고려 말 하즙이 심은 원정매 원정(元正)은 그의 시호이다
원 줄기는 말라 죽었으나 밑둥치 옆에서 가지가 나와 꽃을 피우고 있다.
모 신문에서는 줄기만 보고 죽었다고 보도했다.
히즙이 개경에 살 때 지었다는 매화 시(詩)
3월 중순이면 섬진강 일대는 전국 각 지에서 몰려 온 매화를 감상하려는 상춘객들로 붐비기 시작한다. 특히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일대는 아름다운 섬진강과 지리산은 아직 흰눈에 덮여있는데도 수백 그루의 매화나무가 일시에 하얀 꽃봉오리를 터뜨리기 때문에 장관(壯觀)을 이루어 보는 이들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여 지역경제를 향상시키고 지역을 널리 알리는 매화축제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 매실을 이용해 전통식품을 개발, 국민건강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으로 대량으로 매화나무를 심어 농장을 조성한 개척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현장을 보면서 시·군에 근무하는 공무원의 지역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대구시공무원도 그랬듯이 산청군 공무원들에 대해서도 실망이 크다. 대구 안심일대는 금호강의 범람으로 이루어진 습지가 많아 벼 대신에 연(蓮)을 재배해 우리나라 연근(蓮根)생산의 60~70%를 점했을 만큼 광대한 연 밭을 가지고 있었으나 전남 무안군처럼 축제를 개발하지 못했고, 경남 산청군 역시 수령 640여 년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단성면 남사리의 ‘원정매’, 630여 년의 같은 면 운리 단속사지의 ‘정당매’, 440여 년의 시천면 사리의 ‘남명매’ 등 소위 “산청3매”가 오래 전부터 있었으나 광양시와 같이 매화축제를 개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의 공무원들이 이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전남의 무안군이나 광양시공무원들은 축제로 활용해 지역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라한 나의 지적에 대해 어떻게 그 것이 공무원만의 책임이냐고 반론을 제기할 수 있으나 아이디어를 개발해 구·군의원들을 설득하는 책임도 공무원에게 있다면 달리 할말이 없을 것이다.
신문(경남신문, 2007, 2,22)을 보니 원정매(元正梅)가 고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노거수 찾아보기를 좋아하는 일행은 2007년 3월 16일 산청 3매를 찾아 나섰다. 우선 성철(1912~1993)스님을 기리는 겁외사를 둘러보고 단속사지로 향했다. 세 번째 산청을 방문하였으나 역시 길을 잘 몰라 남사리를 지나쳤다. 정당매, 남명매를 보고 돌아가는 길에 원정매를 보기로 했다. 예년보다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미 정당매는 시들고 있어 개화기를 또 놓쳤다. 그러나 그런대로 사진은 찍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왔을 때와 는 달리 안내표석이 지나칠 정도로 크게 서 있었을 뿐 아니라, 주변에 꽃이 아주 흰 어린 매화가 만발해 있었다. 정당매가 워낙 기력이 쇠해 후계목을 저렇게 잘 보존해 놓았구나. 누가 심었는지 모르지만 참 잘한 일이다. 하고 지나가는 주민에게 물어보았더니 씨를 받아 키운 것도 접을 붙여 키운 것도 아닌 딴 품종을 사다 심은 것이라 했다.
그러면 그렇지!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이 오히려 후회가 되면서 공무원들의 무성의에 다시 한번 화가 났다. 모수(母樹)의 유전자를 그대로 유지시키려면 접(接)을 붙여 묘목을 생산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그럴 여건이 아니라면 씨를 받아서 묘목을 생산해 심어도 될 터인데 정당매와 전혀 개체가 다른 나무를 심어 어쩌겠다는 말인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섭섭한 마음을 뒤로하고 나오는 길의 가로수를 보니 더 아쉬웠다. 이 전나무 대신에 정당매를 심었다면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매화길이 될 수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 올 터인데 그런 점을 전혀 고려하지 아니하고 아무렇게나(?) 조성한 것이다.
영남학파 쌍두마차의 한 분인 영원한 처사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의 혼이 서린 덕천서원과 산천재를 들러 남명매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부근의 사적지를 들어서니 일행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큰 산수유가 꽃을 피우고 있으나 꽃망울이 듬성듬성 달린 것이 수세가 약해 보였다. 관리하는 분이 있기에 새로 심은 것이냐고 물었더니 원래 자라든 나무라고 했다. 주변을 살펴보니 이 나무 이외에도 큰 나무들을 베어버리고 남은 밑둥치가 여러 개 보였다. 이곳을 새로 단장하면서 흙을 너무 많이 덮어 뿌리호흡에 이상이 생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관리하는 분에게 흙을 당초 상태로 걷어내 줄 것을 부탁하고 실내를 둘러보고 문을 나와 남사리에 들렸다. 토담이 사람 키보다 높은 것이 여느 마을과 달랐다. 길이 미로처럼 얽혀 해매기를 수차례 마침내 ‘원정매’를 만날 수 있었다. 시호가 원정(元正)인 하즙(河楫1303~1380)이 살든 집이라 하여 대원군이 ‘원정구려(元正舊廬)’라 했다는 이집도 퇴락의 길을 걷고 있음이 역력했다.
이곳에는 원정매말고도 원정공의 후손으로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문정공 하연(河演1376~1453)이 7살 때 심었다는 올해로 624살을 맞는 감나무 한 그루가 더 있었다. 허물어진 담을 넘어 채전 밭에 자라고 있는 감나무를 보고 원정매를 만났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신문 보도와 달리 밑둥치에서 나온 가지가 살아남아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미 보았던 정당매, 남명매와 달리 분홍색이어서 화려한 색을 좋아하는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을 것 같았다. 산청군의 자료에는 나무가 있는 집의 당호 분양고가(汾陽古家)를 따서 분양매(汾陽梅)라고 하였으나 다른 자료를 보면 심은 사람 하즙의 시호(諡號)를 붙여 “원정매(元正梅)라고 하여 혼란스러우니 통일된 이름이 제정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정공 하즙은 이곳 여사촌(餘沙村, 남사리의 옛 이름)에서태어나 1324년(충숙왕 11)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정치도감의 일원이 되면서 권세 있는 사람들이 힘없는 백성들의 재물이나, 토지를 빼앗아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를 처벌하는 직책을 수행했는데 특히 그 중에서 누나가 원나라 순제(順帝)의 비(妃)인 기황후인 것을 기화로 악행을 일삼는 기삼만(奇三萬)을 처단하는 등 정사를 바르게 보아 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서해도안렴사, 경주부윤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이른 분이다. 아들 윤원(允原) 역시 문과에 급제 경상도를 비롯하여 4도의 안렴사와 원주, 상주의 목사를 지내고 대사헌에 이르렀으며, 손자들 역시 벼슬길에 나아가고, 증손자 연(演)이 마침내 영의정이 되니 진양 하씨를 반석에 올려놓았고 할 수 있다. 후에 진천부원군에 봉해졌다.
그가 당시 수도였던 개경에 집을 짓고 매화를 심어 놓고 살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舍北曾栽獨樹----·집 뒤뜰에 일찍이 매화 한 그루를 심었더니
臘天芳艶爲吾開---추운 날씨에 꽃이 아름답게 나를 위해 피었구나.
明窓讀易焚香坐 ---밝은 창문 앞에 주역을 읽고 향을 피우고 앉았으니
未有塵矣一點來---이 세상의 근심 걱정이 아주 잊을 만 하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원정매는 선생이 낙향할 때 개경에서 가져와 심은 것으로 보인다. 연보(年譜)가 없어 언제 고향으로 돌아 왔는지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선생의 말년에 해당하는 1370~1380년경으로 본다면 이때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수령을 630~640년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단속사에 정당매를 심은 강회백(1357~1402)은 원정공의 외손자이다. 진양 하문(河門)을 상징하는 귀한 나무가 신문 보도처럼 언제 죽을지 모른다. 후손들이 빨리 손을 써서 잘 가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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