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거인 조식 선생과 남명매
산청 3매를 구경하기 위한 우리 일행(박종혁 전 교장, 심후섭 대구문인협회 회장, 조기훈 대구향교 장의, 필자)은 3월 5일 대구를 출발해 큰 은행나무로 더 잘 알려진 고찰 연수사와 한국전쟁의 회오리 속에 억울하게 희생된 거창사건추모공원을 둘러보고 남사리로 향했다. 먼저 이동서당(尼東書堂)을 찾았다. 유학자로 많은 후진을 양성하고 파리장서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곽종석(1846∼1919) 지사의 우국충정을 헤아려보고 이어 탐매(探梅) 활동에 나섰다. 먼저 대원군의 원정구려(元正舊廬) 편액이 걸린 하씨 고가를 찾아 원정매(元正梅)에 앞에 섰다. 원정(元正)은 고려 말 문신 하즙(河湒)의 시호로 즉 하즙이 심은 매화이다. 이어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이 심은 정당매를 보고 늦은 점심을 문익점기념관 부근의 식당에서 먹고 마지막 목적지 남명매가 있는 산천재로 향했다.
남명이 61세 때 거처와 강학을 위해 산천재를 심고 삼은 남명매
남명이 61세 (1561년) 때 당신의 마지막 거처로 정한 곳이다. 그는 이곳에 자리 잡은 소회를 “덕산복거(德山卜居)”에서 “봄 산 어느 곳엔들 향기 나는 풀 없으리오만 (春山底處無芳草), 다만 천왕봉 하늘나라 가까운 걸 사랑해서라네, (只愛天王近帝居), 맨손으로 들어와서 무얼 먹고 살건가? (白手歸來何物食), 은하수같이 맑은 물 십리니 먹고도 남겠네 (銀河十里喫猶餘)라고 했다.
앞은 맑은 덕천강이 흐르고 지리산의 웅자(雄姿)가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으로 남명의 산수를 보는 안목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뜰 앞에 송죽이나 국화 등 선비들이 즐겨 심던 잡다한 나무를 제외하고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매화 한 그루를 심었으니 후세 사람들이 남명매(南冥梅)라고 부른다. 한때 한강 정구나 동강 김우옹, 내암 정인홍, 망우당 곽재우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제자들로 뜰이 가득 찼을 것이나 지금은 매화 홀로 우뚝 서 있다.
남명매 근경
기념관의 안(安) 해설사가 지난주가 절정기라고 했는데 몇 번 찾아왔지만, 오늘같이 만개한 모습은 처음이고 뿐 아니라, 날씨마저 화창해 먼 곳의 천왕봉이 한눈에 들어왔다. 남명은 이 매화에 대해 한 편의 시“우음(偶吟)”을 남기니 누군가 빗돌에 새겨 감상하도록 배려했다.
작은 매화 아래서 책에 붉은 점을 찍다가 朱點小梅下
큰 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高聲讀帝堯
북두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고 窓明星斗近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江闊水雲遙
산천재
영남을 인재의 보고(寶庫)라고 말한 것은 최치원, 안향(安珦), 정몽주, 길재, 김종직 같은 큰 유학자를 배출한 것을 강조한 면도 있지만, 좌도의 퇴계 이황(退溪, 李幌 1501~1570 )과 우도의 남명 조식이 인재를 길러냈기 때문에 더 합당한 말이 되었다고 본다. 두 학자가 뿌린 씨앗이 조선 중기 이후는 물론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처신은 서로 달라 남명은 끝까지 벼슬을 사양한 데 비해 퇴계는 현실정치에 참여한 점이 다르다. 따라서 두 분의 가치관과 학풍에도 차이가 있다. 이는 임진왜란이라는 초유의 국난을 대처하는 방법에서 잘 나타나는 데 퇴계의 제자 류성룡과 김성일 등은 조정의 신료로서 수습에 매진(邁進)한 반면에 남명의 제자 정인홍, 곽재우, 김면 등은 재야에서 의병(義兵)을 모아 구국 활동을 펼친 점에 차이가 있다. 두 문중의 선의 경쟁이 결과적으로 조선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키고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인재들을 배출했다고 본다. 남명의 인간 됨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단성소에서 찾을 수 있다.
남명이 생전에 자주 올랐다는 지리산 천왕봉
“····내신(內臣)들은 파당(派黨)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외신(外臣)들은 향리(鄕吏)에서 백성들을 착취하여 이리떼처럼 날뛰면서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이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 자전(慈殿, 문정왕후)께서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밖의 소식이 막힌 깊은 궁궐 안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는 나이 어린 선왕(先王)의 한 외로운 자식일 뿐입니다. 저 많은 천재와 천 갈래 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무엇으로 막고, 어떻게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의 이른바 단성소(丹城疏)이다.
죽음을 무릅쓴 각오가 된 사람이 아니고는 말할 수 없는 격한 글이다. 중신들뿐만 아니라, 명종을 놀라게 했으며 심지어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어떤 사람은 조선 500년사에도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한다.
지조 있는 선비 남명이 심은 매화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은은한 향기로 많은 사람을 불러들인다. 산청 3매 여행은 선인의 고결한 인격을 생각해 보게 하고 꽃의 아름다움을 통해 마음의 떼를 씻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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