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재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심었다는 대나무
길재를 기리는 야은사
금오산 기슭에 있는 채미정
지금은 많이 쇠퇴해졌지만 60~70년대 초,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충효(忠孝)에 대해 많은 시간 공부를 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진행되는 국기 하강식에는 장소가 어디든 애국가만 울려 퍼지면 멈춰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경례를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최근 개인주의 사상이 팽배해지고 이런 행사가 나라사랑보다는 정권을 비호하는 것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많이 축소되거나 폐지되어 아쉽다. 그러나 정권은 유한해도 나라는 무한하기 때문에 불편하지만 나라사랑은 지속되어야 한다. 특히 F·T·A 등 국가 간 교역이 확대되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고 피눈물 나는 노력을 기우리는 현실을 볼 때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정몽주, 이색과 더불어 고려 말 3은의 한 사람이자 충신으로 불리던 길재(吉再 1353~1419 )선생을 만나는 기회를 맞아 나라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데 인걸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라는 야은의 <회고가>도 많이 읽혀지는 시조이지만 17세기 조선의 성리학자 장현광( 張顯光)의
선생이 대나무를 저버리지 않으니
우주에 윤리강상이 지켜지게 되었고
대나무가 선생을 저버리지 않으니
천지에 순하고 굳센 기운이 있게 되었네.
선생은 떠나가도 대나무는 그대로 있으니
빛이 더욱 늠름하고 바람이 더욱 시원해라
조물주가 은근히 보호하여
의로운 뿌리 끊어지지 않게 해서.
빼앗기지 않는 곧은 정조 표창하고
우뚝한 큰 절개 드러낸 것이 아닌가.
라는 <야은죽부, 冶隱竹賦>를 보고 사실 놀랐다. 선생이 기우런진 고려의 수도 개경을 뒤로하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면서 대나무를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으나 확신이 서지 않던 차 이 나무를 두고 지은 시가 있어 더욱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대나무를 심은 장소가 많은 자료에서 금오산 도립공원내 채미정(採薇亭,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5호)으로 되어있는 점이다. 아우 만농(晩儂)을 불렀다. 구미시청에서 오래근무하기도 했지만 나와 비슷한 취미를 가지고 있는 그는 영남유학의 학맥에 대해 전공자를 능가할 정도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구미, 선산, 인동지역의 사료발굴에 열정을 쏟고 있어 이일을 밝히는데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우와 나는 우선 구미시 도량동에 있는 선생의 향사(享祀)인 야은사(冶隱祠)를 찾았다. 마을 인접이라 올라가기는 수월했으나 선생이 우리니라 유학에 끼친 영향에 비하면 너무 초라하고 규모도 작아 실망스러웠다. 사당 주변에는 글로만 대하든 야은죽(冶隱竹)이 무성했다.
다시 차를 돌려 채미정으로 향했다. 가을로 접어드는 길목이라 여름 내 힘차게 자란 나무들의 싱싱한 모습과 그리 크지는 않지만 아담한 경모각을 비롯한 경내의 부속건물이 한 폭의 그림 같이 정갈했다. 아이들을 대동한 젊은 부부, 데이트 중인 연인들이 있어 적막하지도 않았다. 이곳 사당 뒤편에도 대나무가 울창했다.
채미정은 1768년(영조 44)에 지어진 반면에 야은사는 그보다 이른 1403년(태종 3)에 선생이 낙향 후 생활근거지로 삼았던 일명 율리에 지어진 것이니 선생이 심었다는 대나무는 야은사의 대나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또한 여헌 장현광의 생존 년대와 그의 시 ‘야은죽부’는 채미정을 짓기 이전에 지어진 작품이라 더 확실한 증거가 된다.
선생은 본관이 해평으로 1353년(공민왕 2)태어났다. 8살 때 벼슬길에 오른 아버지가 보성대판(寶城大判)으로 나아갔으나 어머니와 달리 같이 가지 못하고 외갓집에 떨어져 살아야 했다. 박봉이라 여러 식구를 먹여 살리기 어려워 떼어 놓은 것이라고 하니 아버지 원진은 여느 관료와 달리 청렴하게 살았던 것 같다.
그 후 아버지가 임지를 개경으로 옮기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온 어머니 품에 안길 수 있었다. 이때부터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그는 인근 냉산의 도리사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부에 매달린다.
그러나 평화로운 생활도 잠시 개경에 있던 아버지가 새 부인을 맞아들이자 어머니는 남편을 원망하며 밤마다 울었다. 이 때 선생이 나서서 ‘남편이 비록 옳지 못한 일을 해도 비난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며 어머니를 타 일렀더니 그의 말에 감복해 다시는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면을 보면 선생은 또래의 청소년들보다 생각의 폭이 넓었던 것 같다.
18살 되던 1370년(공민왕 19) 상주의 박분(朴賁)으로부터 맹자, 논어를 배우며 성리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후 개경으로 올라가 당시 최고 석학들인 이색, 정몽주, 권근 등에게 본격적으로 학문을 배워 31살 되던 해인 1383년(우왕 9) 사마감시에 합격하고, 그 해 중랑장 신면(申勉)의 딸과 혼인을 하는 겹경사를 누린다.
1386년(우왕 12) 34살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성균관 학정에 제수되었다. 이후 성균관 박사, 문하주서로 승진하였으나 1930년(공양왕 2)38세라는 한창 일할 나이에 노모를 모신다는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조선조 동문수학했던 태종이 그를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독서와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다. 김숙자, 김종직, 정여창, 김굉필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학맥은 그 후 조선의 정치이념으로 자리 매김 되었다. 1419년(세종 1) 67세를 일기로 돌아가시니 ‘야은집’ ‘야은속집’ 그리고 제자 박서생이 엮은 ‘야은언행습유록’이 전한다. 1739년(영조 4) 충절(忠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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