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부사 전천상의 애민정신이 빛나는 하동송림

이정웅 2007. 8. 26. 09:51

 1745년(영조 21) 충청도 홍성출신의 하동부사 전천상이 바람에 날려오는 모래를 방지하여 주민의

생활과 농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하동송림 한 공직자의 애민정신을 되새겨 볼 수 있는 현장이다

 하동송림의 유래를 적어 놓은 조형물 ,숲을 조성한 부사 전천상이 어떤 사람인가를 밝히는 내력이

부족해 아쉬웠다.

 물맑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섬진강

 

 

하동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이 지역 공무원들이 자치시대에 걸 맞는 행정을 잘 펼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왜냐하면 지역 풍토에 맞는 과수를 재배하거나 나무를 가꾸어 이를 관광자원으로 잘 활용하여 주민 소득을 높이는 모습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유채꽃, 진해 벚꽃, 구례의 산수유꽃 , 무안의 연꽃, 광양의 매화축제 등은 그 지역의 식물자원을 활용하여 관광객을 모아 주민소득을 올리고 지역의 브랜드를 높이는데 성공한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런 현명한 자치단체공무원이 있는가 하면, 좋은 자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식이 부족하거나 무지하여 그렇게 하지 못하는 단체가 있기 때문에 하동군이 더 돋보인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대구 동구의 경우 한 때 우리나라 연근(蓮根)소비량의 60%에 점하는 방대한 면적의 연 밭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안과 부여의 궁남지 같은 관광지로 개발하지 못했고, 하동 인근의 산청군은 단속사지의 정당매, 산천재의 남명매, 남사리의 원정매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는 곳이지만 이를 자원화하지 못한 점이 그 것이다.

그러나 하동은 달라 보인다. 오래전부터 ‘쌍계사10리벚꽃길’로 관광객을 모아왔지만 근년에는 매화를 많이 심어 광양매화축제 때 더불어 관광객을 모으고, 최근에는 대봉감, 고로쇠약수제와 야생 차(茶)행사를 개발해 5가지 나무를 주제로 한 축제만으로 막대한 군민의 소득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섬진강과 지리산을 바탕으로 청학동, 화개장터, 별미인 재첩국, 평사리 최참판댁 등 이런 자원들을 아울러 개발하려는 공무원들의 노력이 계속되는 한 멀지 않아 살기 좋은 고장이 될 것이다. 쌍계사 계곡 에 있는 최 고운이 지리산에 들어가면서 꽂은 지팡이가 자랐다는 푸조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123호)를 보고 재첩국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최근 천연기념물 제445호로 지위가 격상된 ‘하동송림’으로 향했다.

 

“이 송림은 1745년(영조 21) 하동부사 전천상공(田天祥公)이 섬진강변의 바람과 모래를 막아 백성들을 잘 살게 하기 위하여 광평리 일원에 심었다. 1935년 섬진강교를 준공하고 홍수방지를 위한 제방공사를 하면서 송림의 일부가 훼손되어 지금은 7,881평에 620여 그루의 노송과 300여 그루의 작은 소나무가 전국제일의 인공 숲을 이루었다. 맑고 푸른 섬진강이 감돌아 흐르고, 백사장과 어울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백사청송(白沙靑松)은 관광객들의 관광명소이자 군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거친 모래바람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소나무의 선비 같은 기상을 본받고 백성들을 사랑한 한 목민관의 애민정신을 기리고자 여기 송림의 유래를 적어 알린다.”

 

라는 것이 유래비의 내용이다.

따라서 이 하동송림은 360여 년 전에 부사 전천상이 숲의 여러 가지 기능 중에서 바람에 날려 오는 모래로부터 논밭이나 마을을 보호하기 위한 방사림(防沙林)으로 조성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만이 아닌 것 같다. 당시 남해안에 자주 출몰해 백성들을 괴롭혔던 왜구로부터 마을이 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군사적인 목적도 있지 아니하였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역사 이래 많은 공무원이 공직을 수행하면서 청백리로 존경받든지 아니면 선정을 펼쳐 불망비로 후세에 알려지기도 하지만 나무를 심어 오랜 세월이 가도 주민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특히 산림공무원으로 푸른 대구가꾸기와 대구수목원 조성에 열정을 바쳤든 나로서는 그런 전천상의 행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선정을 펼치고도 묻혀버린 그분을 알리는 일이 내 임무 같기도 했다.

때마침 고교 동창이자 경찰서장 등을 거치면서 오래 공직생활 한 같은 전문(田門)의 친구가 있어 ‘선조 중에 천(天)자, 상(祥)자 어른이 이런 좋은 일을 하였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전(田)씨 족보를 찾아보는 등 우여곡절 끝에 충청도 홍성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어서 족보와 군청 홈페이지 향토문화자료실을 통해 간략하나마 그의 이력을 살펴 볼 수 있었다.

그는 본관이 담양으로 아버지 홍주(지금의 홍성군)영장이었던 전시원의 넷째 아들로 1705년(숙종 31)에 태어났으며 호는 죽암(竹菴)이었다. 경사, 병법, 술수 등에 능하였을 뿐 아니라, 글씨에도 일가견을 가졌는데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나라를 위해 훌륭한 일을 한 후손에게 주어지는 음관(蔭官)으로 선전관이 되었다가 나중에 무과에 급제했다. 희천, 수안군수를 역임하고 춘천부사, 하동부사를 지냈으며 나주 영장(營將)으로도 있었다. 천품이 인자하여 가는 곳마다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왕이 내린 문서 즉 새서(璽書)도 받았다. 신미년(영조27년으로, 1751년이 된다. 정선이 ‘인왕채색도’를 그리고 이중환이 ‘택리지’를 완성한 해이기도 하다)5월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정을 펼쳤던 관료에 비하면 그의 이력은 너무나 간단했다. 아마 한창 일할 나이에 죽어 그의 천부적인 자질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자료를 보니 후처 광주 이 씨는 시부모를 잘 모셨을 뿐 아니라 남편인 죽암이 병상에 눕자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다가 그가 죽자 두 달 후 29세라는 젊은 나이로 따라 죽으니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고 한다. 하동송림은 공해가 없고 배수가 잘 되는 좋은 토양에 자라 생육상태가 양호한 편이나 빈 공간에는 어린 나무를 더 심어 다음 세대를 이을 나무를 심어 둘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부탁은  이런 훌륭한 관리 덕분에 하동군민이 오랜 세월 재해로부터 안정된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그런 인물을 배출한 충청도 홍성과 양 군이 자매결연을 맺어 비록 사후이지만 인연을 유지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