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여헌 장현광선생과 입암서원 은행나무

이정웅 2007. 8. 12. 08:49

 여헌 장현광과 권극립 등 소위 입암사현을 기리는 입암서원

 장현광이 향나무와 함께 심은 서원 앞에 있는 은행나무

 마을 이름 입압(立巖)을 있게한 선바위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이자 구미시 인동 출신인 여헌 장현광(張顯光, 1554~1637)선생이 포항시 죽장면 입암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가르치시다가 돌아가셨음은 물론 생존 시에 심은 향나무(경상북도기념물 제71호)가 1657년(효종 8) 선생의 유허지에 세워진 입암서원 안에 자라고 있다는 자료를 보고 다소 흥분되었다.

나그네라는 자호(旅軒)가 말하고, 임진왜란이라는 큰 전쟁으로 일정한 곳에 붙박여 살수 없었던 그분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만 태어난 인동(仁同)만 해도 낙동강이 휘감고 돌아가는 아름다운 곳일 뿐만 아니라, 주변에는 길재가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던 금오산 등 경승이 아름다운 곳이 있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든 8월 초순 죽장의 입암을 직접 찾아보기로 했다. 자주 경험하는 일이지만 먼 거리를 갔으나 문이 잠겨있어 헛걸음칠 때가 많아 이번에는 미리 한국관광공사의 안내 싸이트를 통해 현장을 관리한다는 이장(里長)과 접촉했더니 본인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다시 포항시 홈페이지를 이용해 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었으나 몇 사람을 바꾸어도 회답을 들을 수 없어 휴대전화로 긴 통화를 할 수 없으니 확실히 알아서 연락을 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끊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올해를 ‘경북방문의 해’라고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후 연락은 왔으나 열쇠를 가진 분이 출타해 곤란하다고 했다. 내용을 알만한 후손의 전화번호라도 알려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농협에 근무하는 권중예님을 소개 했다.

출발 하루 전 권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무슨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오느냐고 했다. 서원 안에 있는 향나무를 보러간다고 했더니 그 일이라면 올 필요가 없다는 투였다. 왜냐하면 몇 년 전에 죽어 흔적도 없다는 것이다.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지난 번 경상북도 기념물 제101호인 청도의 사철나무를 보러 갔다가 말라 죽은 것을 보고 우리 문화재정책이 이정도 수준 밖에 되지 않는데 대해 실망을 했었는데 또 죽었다니 이런 부실한 자료 관리를 해 놓고도 많은 사람이 찾아오길 어찌 바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겠으니 안내를 부탁한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향나무와 함께 심은 은행나무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아내와 딸 은정이와 함께 출발했다. 예보에서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내릴 것이라고 했지만 이미 약속했고 가다가 비가 많이 와서 포기할 정도면 포항에 내려 오랜만에 회나 먹고 오기로 했다.

고속도로는 피서 철이 실감나게 차들로 넘쳐 국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예보와 달리 비가 오지 않아 어려움이 없었고 오히려 낯선 풍경들이 너무 아름다워 마냥 즐거웠다. 죽장면은 생각보다 깊은 오지였으나 계곡은 물이 맑아 피서인파로 넘쳤고 덩달아 조그마한 시골 면소재지가 차와 사람들로 북적대 장날 같은 기분이 들었다.

휴일인데도 근무하고 있던 권과장의 안내를 받고 도착한 마을은 이름이 말하듯 입구에 큰 선바위 즉 입압(立巖)이 있었다. 영양군의 입암보다 규모는 작으나 주변과 잘 어울려 풍경이 아주 수려했다. 서원 앞 냇가에는 물보다 사람이 더 많았다. 향나무는 몇 년 전 태풍 매미 때 쓰러져 시(市)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죽었다고 했다.

남쪽 언덕 수령 300년이라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었다. 산림공무원으로 보호수업무를 보아 알지만 노거수 나이는 대개 주민들의 구전(口傳)에 의해 산정하기 때문에 엉터리가 많다. 이런 행정행태를 감안한다면 보호수판에 기록된 수령을 무시하고, 1600년 전 후 여헌이 심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숲 속에는 임란의병장이자 선무원종3등 공신으로 여헌을 이곳으로 모신 동봉 권극립(1558~1611)의 유허비가 있었다. 비문에 의하면 1596년(선조 29) 의병활동을 하던 중 청송 속곡촌에 피란 중이던 여헌을 만나 이곳 경치를 자랑하여 모셔왔으며 난이 끝난 후에도 가끔 다녀갔고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에게 항복하자 이곳으로 은퇴 얼마 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가 기숙했던 살림집 만활당과 일명 ‘입암사현(立巖四賢)으로 불리는 권극립, 정사상, 손우남, 정사진이 여헌과 함께 공부하던 일제당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처삼촌이자 큰 성리학자인 한강 정구로부터 배웠다는 것이 다수설인데도 불구하고 독학(獨學)으로 학문을 성취했다는 일부 제자들의 주장이 있을 만큼 여헌이 훌륭한 학자임은 틀림없다. 특히 재상 유성용은 1595년(선조 28)그를 보은 현감으로 천거했을 뿐만 아니라 ‘후일 세상에 다시없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하며 아들을 진(袗)을 맡기도 했다.

1637년(인조 15) 9월 15일 조선왕조실록에서 사관(史官)은

“장현관의 자는 덕회이고 본관은 인동이다. 젊어서부터 과거공부를 하지 않고 성리학에 전념했다. 선조 때에 대신이 천거하여 여러 번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또 고을 수령을 제수하자 비로소 명에 따랐으나 곧 버리고 돌아갔다. 반정(인조반정을 뜻함)한 처음에 상이 하교하기를 국가가유도를 숭상하지 않으면 어떻게 다스리겠는가 하고는 사헌부 장령으로 징소(徵召)하였다. 한 해 안에 징소 하는 명이 잇달으므로 드디어 조정에 나아가니 상이 매우 후하게 예우하고 앞으로 크게 쓸 뜻이 있었으나 얼마 안가서 상소하여 돌아가겠다고 청하였다. 그 뒤 또 교자를 타고 올라오게 하였는데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대서헌과 우참찬에 이르렀다. 청축년의 난(청에 대한 인조의 항복) 때에 영천 입압으로 들어가 졸하니 향년 84세였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장현광은 바르고 어질고 겸손하고, 검소하여 옛 사람의 풍도가 있었는데 이제 문득 졸하니 내 매우 슬프다 ’ 하고 이어서 장사를 치를 물건을 넉넉히 주어서 장사지내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가 지은 <역학도설(易學圖說)> <성리설> 등 서적이 세상에 유행하며, 그 문하에서 유학한 자가 매우 많았다. 여헌선생(旅軒先生)이라 칭한다.” 라고 했다.

어렵게 방문했지만 여헌이 심은 은행나무를 볼 수 있었던 행운은 오래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