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탁영 김일손선생과 자계서원 은행나무

이정웅 2007. 8. 4. 23:09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 피해자인 탁영 김일손(1464~1498)을 기리는 자계서원 전경

 탁영이 생전에 심었다는 수령 500여 년의 은행나무 그의 올곧은 선비정신을 상징하듯 하늘 높이 자라고 있다.

 탁영 선생이 직접심었다는 수식목(手植木) 표석, 오늘날의 기념식수를 옛날에는 손수심었다는 뜻 수식으로 표현한 것 같다

 

푸른 대구 가꾸기를 통해 많은 나무를 심은 바 있는 나는 지난 가을부터 누가 심은 것이 분명하거나 아니면 심었다는 이야기가가 전해오는 나무, 그리고 누가 심은 것은 아니지만 백성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오래된 큰 나무를 찾아 다니고 있다.

다만, 심은 사람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훌륭한 인물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어야 함은 물론 이미 고인(故人)이 된 분이어야 한다는 나름대로 기준을 설정해 두고 있다.

지난 가을부터 이런 일에 매달리며 자료를 정리하다가 보니 마음이 앞선 나머지 일부 오류도 저질렀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탁영 김일손과 뚝향나무’였다. 문재(文才)가 부족하여 글이 조잡함은 차치하고라도 선생의 생몰(生沒) 년도를 잘 못 표기하여 독자는 물론 후손들에게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다.

며칠 전 유호연지를 보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士禍) 피해자인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1464~1498)선생을 기리는 자계서원으로 향했다. 탁영이 사지(四肢)를 찢기는 날이 그랬든지 그날따라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잠시지만 땀을 뻘뻘 흘러야 했다. 처음 운계리였으나 서원을 짓고 마을 이름이 서원리(書院里)로 바뀐 마을 앞은 내가 흐르고, 뒤에는 대나무가 무성한 낮은 산이 감싸고 있어 퍽이나 아담해 보였다. 같이 동행한 김종학님에 의하면 청도의 대표적인 행사 소싸움대회나 정월 대보름 달집태우기가 모두 이 마을 앞 서원천변에서 치러진다고 한다.

본관이 김해인 탁영 김일손은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세까지 할아버지 극일(克一)로부터 <소학> <동사강목> <사서> 등을 배우고 이어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김광필, 정여창, 강혼 등과 함께 학문의 깊이와 폭을 넓혔다. 23세 되던 해인 1486년(성종 17) 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나아갔다.

1491년(성종 22) 장래가 촉망되는 문신(文臣)에게 주어지는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혀 학문연구와 독서에 매달리는 영예를 누린다. 이어 정언, 이조좌랑 · 정랑 등을 두루 거치면서 공직자로서 자질을 더욱 향상시켰다. 한 때 글의 음운이나 제도 등에 관한 의문점을 중국에 가서 알아오는 임시직인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그곳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정유라는 사람이 지은 소학집설(小學集說)를 가지고 귀국하여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이렇게 공직자로서 직무에 충실할 즈음 예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성종은 세조 때부터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에 정책을 집행함에 있어 사림파의 의견을 수용해 주어 여러 면에서 성리학을 접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올곧은 관료이자 부정과 비리를 적발하고 시정하는 직책인 정언과 이조(吏曹)에 근무하면서 기득권층의 부패를 누구보다도 강하게 비판했던 탁영( 길일손의 호)은 유자광, 이극돈 등 권신들의 미움을 크게 사게 되었다. 스승 김종직 또한 남이장군의 옥사(獄事)가 간신 유자광의 무고로 생각하는 등 훈구 세력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동안 사림파를 옹호해주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1498년( 연산군 4) 때마침 성종실록을 편찬하기 위한 실록청(實錄廳)이 설치되고 춘추관 기사관으로 있던 탁영은 스승 김종직이 중국의 초나라 의제가 항우에게 내 �긴 사실을 애도해서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史草)에 실어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극돈이 이를 알고 세조를 비방하는 내용이라며 간신 유자광에게 알렸다.

그렇지 않아도 사림파를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엇보고 있던 훈구파들은 김종직 김일손이 대역부도(大逆不道)를 도모했다고 연산군에게 보고하니 대노한 연산군은 죽은 김종직은 관을 쪼개어 목을 잘랐을 뿐 아니라 그가 쓴 책마저 불살라 버리고 관련자를 처형했다. 이 때 희생되거나 죄를 받아 처벌된 사람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한 사람은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고, 곤장 100대에 3천리 유배된 사람은 표연수, 정여창, 홍한, 이총, 강경서, 이수공, 등이며, 이주, 김굉필, 박한주 등은 장 80대에 유배형에 처해졌다.

밝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 보려던 선비 탁영은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러나 훗날 바른 평가가 내려지면서 순조 대에 이르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방문한 날 자계서원은 굳게 문이 잠겨 있었다. 이웃 사람이 맞은 편 집을 가르쳐 주어 큰 소리로 주인을 찾으니 8순에 가까운 관리인이 나왔다. 우선 탁영이 생전에 심었다는 은행나무를 찾았다. 한 그루는 외줄기에 가지가 두 개, 다른 하나는 맹아(萌芽)가 수없이 많이 돋았을 뿐 아니라, 큰 줄기만 해도 모두 7개였다. 한 아름도 넘는 큰 나무였다. 탁영 수식목이라는 안내판이 있었으며 관리인은 2그루 다 탁영이 직접 심은 암나무라고 했다. 두 그루 사이에 탁영의 문학비가 서 있었다.

 

푸른 물결 넘실넘실 노 소리 부드러워/소매에 찬 맑은 바람 가을인양 서늘하다/ 머리 돌려 다시 보니 참으로 아름다워/흰 구름 자취 없이 두류산을 넘어 가네/

 

1489년(성종 20) 4월 29일 그의 나이 26세 때 섬진강에서 지리산을 읊은 시라고 한다. 이 때가 일두 정여창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했을 때가 아닌가 한다.

생육신인 남효온과 더불어 죽림칠현의 한 분인 신영희(辛永禧)가 “그는 참으로 세상에 드믄 인재이며 조정의 큰 그릇이다”라고 했을 뿐 아니라, 점필재 문하생으로 가장 촉망받던 3인방 탁영, 김굉필, 정여창 중에서 이른 바 선두주자였다고 할 수 있는 탁영 선생만이 왜 문묘에 배향되지 못했는지 아쉽기 그지없다. 저서로는 <탁영집> 회로당기(會老堂記)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선생이 생전에 아끼든 거문고 일명 탁영금(濯纓琴)은 우리나라에서 악기로는 유일하게 보물 제957호로 지정되어 국립대구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