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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가 만발한 한강 정구를 기리는 회연서원
한강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매화
일명 한강매의 꽃(2008,3,25)
2007년은 환훤당 김굉필( )선생을 기리는 도동서원이 사액(賜額)된지 400년이 되는 해이자, 서원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는 은행나무 역시 정구 (鄭逑,1543~1620)가 심은 지 400년이 되는 해이다.
나는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이 수식목(樹植木)을 심은 한강(寒岡 鄭逑의 호)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문헌을 뒤지고 유적지를 둘러보다가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첫째는 그가 퇴계학과 남명학으로 대별되는 영남학을 아우른 분이자 이를 근기지방(近畿地方)까지 확산시키고, 다산 정약용에 의해 실학으로 발전시킨 학자이며, 16세기 서사원, 손처눌 등 대구 출신의 많은 유학자를 길러냄으로 대구에 문풍을 진작 시킨 분이며
둘째는 72세부터 78세까지의 6년간을 대구시 북구 사수동에서 사양정사를 짓고 저술과 후진을 양성하시다가 돌아 가셨으며 만년(晩年)을 보낸 일대가 택지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게 될 처지에 놓였다는 점이다.
특히, 대구사람들이 수구(守舊) 꼴통이라는 일방적인 비판과 달리 고려와 조선조에는 중국계나 일본계 귀화인들을 포용해왔고, 조선중기 이후 당쟁이 극심했을 때에도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이 공존했으며, 이승만 정권시절에는 진보성향의 대통령 후보를 열성적으로 지지했고, 충청도나 전라도 출신 인사를 국회의원에 당선 시킬 만큼 개방적인 정신을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원인(遠因)이 남명과 이황의 학문을 융합시켜 독창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한 한강의 편견 없는 사상이 대구사림들에게 전수되어 이룩된 바탕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구의 폭 넓은 사상세계를 많은 시민들에게 널리 알 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는 일 이외 뚜렷한 방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북구 사수동 즉 옛 이름이 사빈(泗濱)인 이곳 사수로 오시기 전, 옮겨 살았다는 팔거현의 노곡(蘆谷)이 어딘지 알아보기 위해 읍지 등을 살펴보았다. 오늘날 면 단위를 일컫는 방리(方里)편에 노곡이라는 행정구역이 있으나 그 곳이 구체적으로 어느 마을을 지칭하는지를 밝히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 후 팔거현이 일부는 대구로, 일부는 칠곡군으로 편입되어 자료 확인이 더 어려웠다. 다만 한강의 사망으로 사수동의 사양정사가 폐쇄되자 옮겨 가서 새로 지었다는 칠곡군 지천면 신리가 옛 노곡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나는 고향이 칠곡이자 ‘달구벌 얼 찾는 모임’의 사무국장인 한영기 사무관에게 전화를 걸어 고충을 이야기하고 선생의 흔적을 찾아보고 현재 개발 중인 택지개발예정지구 안에 조성할 공원 중에서 중심지에 위치하고 큰 곳을 골라 ‘한강공원’으로 이름하고 사적비(事蹟碑)라도 하나 세워 위대한 성리학자 한강을 기리자고 하였더니 좋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韓) 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상희 전 시장이 현 대구시장 앞으로 한 장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후손들이 한강의 유허비를 단지 내에 만들어 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하였는데 편지의 추진부서가 한 국장 담당 과(課)인만큼 ‘...얼 찾는 모임’에서 이미 준비 중이라고 상사에게 보고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희한한 우연의 일치에 감탄하며 하고자 하는 일이 잘 되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종친들과 연락이 닿아 사수동 현장을 찾았다. 그 곳 출신이자 ‘사수동·금호택지개발주민대책위원장인 박만규씨도 합석해 짐작이 가는 곳을 살펴보았으나 금호강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앉아 강물에 노니는 고기를 바라보았다는 관어대(觀魚臺)의 유구만 확인했을 뿐이다.
참가했던 종인들은 그 것만이라도 만족해하는 것 같다. 그 후 종회의 초청으로 한강의 태지(胎地)와 회연서원, 무흘구곡 등 한강과 관련된 성주지역 유적지를 살펴보는 기회를 가졌다. 특히 회연서원 경내에서 1581년(선조 16) 매화 100그루를 심고 회연초당 또는 백매원(百梅園)이라 부르며 후학을 가르쳤다는 곳에서 그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고매(古梅) 3그루를 확인해 감격했다. 두 그루는 떨어진 씨앗에서 싹이 나서 자라 그런지 아니면 후세에 누군가 보식(補植)을 해서 그런지 줄기가 가는데 비해 한 그루는 썩은 원줄기도 클 뿐 아니라 돋아난 가지도 상당히 커서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
매실(梅實)이 건강식품으로 알려지면서 시중에 많은 매화나무가 거래되고 있으나 거의 대부분이 근본을 알 수 없는 품종들인 반면에 400년 이전에 심은 매화는 토종일 가능성이 높아 유전자 보호차원에서도 보존이 시급한 실정이다.
다행이 수확기로서는 늦은 7월 초순 가지에 열매가 달려있고 바닥에도 떨어져 있어 실생묘라도 키울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하고 떨어진 종자 몇 개를 주어 파종하고 2008년 봄에는 삽수를 채집 접목묘를 생산할 계획이다.
선생 사후 1622년(광해군 14) 백매원 자리에 유림과 후학들에 의해 회연서원(檜淵書院)에 세워졌으며 1690년(숙종 16)사액되었다. 강당에는 제자 허목이 쓴 특유의 전서체 편액이 2점 걸려있으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유물관에서 당시 선생이 입었던 두루마기와 율곡의 아우이자 주로 선산에서 활동하던 이우가 그린 무흘구곡 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는 복사 본을 들고 현장으로 향했다. 제1곡인 한강대와 제2곡인 봉비암은 회연으로 오면서 이미 보았고 이상희 님이 장관시절 고향 사람들이 물 걱정하지 아니하고 농사를 짓도록 하기 위해 조성했다는 성주댐을 지나 대가천을 오르내리는 배를 매두던 바위라는 3곡 배바위(船巖)는 옛 그림과 달리 최근 바위 위에 아담한 정자를 세워 놓았다. 4곡 선바위, 5곡 사인암까지가 성주군 관할이고 6곡 옥류동, 7곡 만월담, 8곡 옥룡암, 9곡 용소폭포는 김천시 행정 구역이다. 그래서 그런지 5곡까지는 안내간판을 잘 설치 해 두어 지나가던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으나 6곡 이상은 관리가 소홀하고 특히 용이 누운 것 같은 큰 바위라서 와룡암이라고도 불렀다는 옥룡암은 찻길을 내면서 잘라버려 흉물스럽게 변해 아쉬웠다.
주변 경관이 아름답고 길도 비교적 호젓하여 1~9곡까지를 청소년들의 극기(克己)코스로 활용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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