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고성이씨 청도입향조 이육이 조성한 유호연지

이정웅 2007. 7. 28. 22:47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고성이씨 청도 입향조 이육이 조성한 일명 유등지로 알려진 유호연지

넓이가 21,000평 둘레가 700미터 깊이가 평균 2~3미터이다

 유호연지 내에 있는 군자정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에게 영남의 명당(名堂)로 알려진 모헌 이육의 묘소

 

 

천혜의 자연 경관을 잘 보전하고 있는 청도는 최근 들어 도시민들의 전원주택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특히, 이서를 통해 청도로 가는 길은 조선조에 이미 개설된 서울과 부산을 잇는 영남대로였다. 그러나 팔조령(八助嶺)이란 험한 재가 있어 여덟 사람이 동행해야 무사히 넘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고, 길이 꾸불꾸불해 많은 시간이 결렸으나 몇 년 전 터널이 뚫리고부터는 접근이 수월해져 이재에 밝은 사람들의 투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소문마저 있다.

봄에는 복숭아꽃이 도원경(桃源境)을 이루고, 여름이면 일명 유등지로 알려진 유호연지(柳湖蓮池)에 연꽃이 만발하여 행락객을 즐겁게 하며, 가을에는 씨 없는 감, 반시(盤柿)가 집집마다 주렁주렁 열려 색다른 풍경을 자아내는 곳이다.

특히, 여름 날 2만 1천여 평의 넓은 호수에 수만 송이의 연꽃이 만발할 때에는 장관을 이룬다. 그러나 이 연지가 500여 년 전 자연과 연꽃을 사랑했던 한 선비에 의해 인공적으로 조성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여 후세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은 많아도 이렇게 아름다운 공간을 조성하여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여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간단히 내력을 적어 놓은 비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아니하여 고향이 이서이자 연지를 조성한 모헌(母軒) 이육(李育 1470~?)의 후손인 이동춘(두류공원 시설담당) 님에게 보다 상세한 자료를 부탁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년 전 대구시 정책연구원으로 근무했던 이석형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나무를 좋아 하는 어머니가 좁은 정원에 오만가지의 나무를 심어 관리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등 대화를 나누던 중 이 계장 이야기가 나오고 유호연지에 대해 자료를 부탁했다고 하였더니 친절하게도 고성이씨 모헌공파종중이 만든 <모헌공파세헌록(慕軒公派世獻錄)>을 보내주었다.

따라서 연지를 만들고 ‘모헌정사’로도 불리는 군자정을 세워 향내 선비들과 어울리며 여기를 틈타 후학들을 가르친 모헌(慕軒, 이육의 호)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 볼 기회를 가졌다.

고성이씨 청도 입향조이기도 한 모헌은 조선조 성종대의 사람이나 출생과 사망년도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없다.

다만 그가 안동에서, 이평(李泙)의 5형제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맏형 윤(胤)과 둘째형 주(冑)와 함께 점필재 김종직 선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나 대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간 두 형과 달리 국가발전에 기여한 사람들의 후손에게 주어지는 문음(門蔭)으로 1493년(성종 24)안기도 찰방(安奇道察訪)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1498년(연산군 4)에 일어 난 무오사화로 대사간 이던 맏형 이윤이 거제도로, 정언이든 둘째 형 이주가 진도로 유배되고, 뒤이어 1504년(연산군 19)에 일어 난 갑자사화에서는 둘째 형 이주가 장살을, 아버지 평(泙)이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뿐만 아니라 두 숙부마저 각기 영해와 영덕으로 유배되는 참화를 겪은 사실도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분이 이곳 청도에 자리 잡게 된 내력은 둘째 형 이주가 전남 진도에 유배되었을 때 그를 문안하기 위하여 안동을 출발 이곳을 청도를 거쳐 진도를 오가든 중 유곡 죽림촌이 ‘산불고이(山不高而) 즉 산이 높지 않지만 수려하고, 지불광이(地不廣而) 들은 넓지 않지만 비옥하니 가히 살만한 곳.’인 것을 알고 정착했다고 한다.

그분은 이런 역사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죽은 아버지는 물론 삼촌과 형제들까지 처참한 수난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벼슬길로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중국의 유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에서 연꽃이 화지군자(花之君子)라는 글을 읽고 마음을 고쳐먹고 손 수 못을 파고 연을 심었으며 못가에 아름다운 정자 즉 군자정(君子亭)까지 지어 선비들을 만나고 후학을 가르치는 장소로 활용한 것이 오늘 날 인근 주민은 물론 도시 사람들의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는 유호연지다.

또한 이 연지는 백성들의 삶의 애환이 깃든 ‘반보기’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우리나라 옛 풍습에는 여자가 시집을 가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친정을 방문할 수 없었다. 엄격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물론 남편과 시동생, 시누이 등 대가족을 뒷바라지 하면서 갓 시집간 새댁이 생각과 풍습이 다른 시집식구들과 어울려 생활한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고, 그럴수록 어릴 때 함께 뒹굴고 자라던 형제자매나 항상 마음으로 감싸주던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였을 것이다. 이런 며느리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시행되든 풍습이 ‘반보기’였다. 추석이 지난 가을 어느 날 친정과 시집이 거리상으로도 반쯤이고, 오고가는 시간을 빼면 반나절 밖에 만나지 못하는 곳에서 1년에 단 한번 친정어머니와 시집간 딸이 만나 회포를 풀고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을 말한다.

유호연지와 군자정은 인근 마을 새댁들의 ‘반보기’ 장소로 1950년 대 후반까지 이용되었으며 또한 1919년에 조직된 그를 기리는 ‘군자정강학계’는 오늘 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한다.

연지 건너편 원산의 청도 입향조 모헌의 묘 터는 풍수지리 상 영남의 명기(名基)로 자손이 번창 할 명당이라고 한다. 선생이 여기에 묻히게 된 데에는 사화(士禍)로 피폐해진 시댁(媤宅)을 일으켜 세우려는 착한 며느리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전해져 오고 있다.

원래는 친정아버지의 묘를 쓸 곳이었는데 며느리가 밤새 물동이로 물을 부어 친정아버지 묘를 쓰지 못하게 하고 시아버지가 묻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헌은 슬하에 5형제를 두었는데, 그 후손들이 오늘 날 청도에 거주하는 고성이씨의 대부분이루며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공무원, 학자, 사업가 등 각 분야에 다양한 인물을 배출했다고 한다.

유호연지는 연꽃만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위기에서 가문을 일으킨 착한 며느리의 마음이 함께 피어나는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