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중인 송시열이 심은 은행나무
송시열의 사적비(왼쪽) 정약용의 사적비(오른쪽)
뿌리 부분(완쪽은 살아 있고 오른 쪽 나무는 죽었다)
장맛비가 예사롭지 않다는 보도를 개의치 아니하고 출발했다. 그러나 경주를 지나기 시작하니 떠날 때와 달리 빗줄기가 굵어졌다. 동승한 이 사장은 전자공학을 전공했으나 조그마하지만 알찬 수목원을 하나 만들고 싶어 해 만난 사람이다.
운전을 못하는 나를 위해 기꺼이 봉사하겠다는 약속을 한 첫 주 일요일, 미사만 마치면 시간이 있으니 어디든 가자고 출발했다. 조건 없이 봉사 하겠다고 했지만 나도 염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 만큼 이왕이면 수목원조성에 참고가 될 수 있는 포항 소재 도립 경북수목원, 기청산식물원과 그동안 보고 싶었든 송시열(1607~1689)선생이 유배생활 중 서당(書堂)을 짓고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있는 장기(長鬐)를 가기로 했다.
인터체인지를 놓쳐 당초와 달리 영천에서 국도를 타고 포항 남부지역에 있는 우암(又庵,송시열의 호)이 심은 나무부터 먼저 보기로 하였다.
사실 나는 우암의 흔적이 경상도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왜냐하면 흔히 남인(南人)으로 불리는 경상도 사람들과 늘 대립관계에 있었던 노론의 영수이자, 높은 학문과 덕망에 비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기보다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북벌정책에 매달리고, 당파의 이익과 기득권층을 보호에 더 노력한 사람으로 재평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답사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점심 시간을 조금 넘은 시각 장기초등학교에 닿았다. 교문 가까운 곳에 수세가 왕성한 은행나무가 있어 살펴보았으나 아니었다. 조금 안으로 들어서니 오석으로 된 두 개의 비가 보였다. 왼쪽은 귀부로 장식한 전통양식의 우암의 사적비이고, 오른쪽 것은 현대식 조형물로 만든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사적비여서 다시 한 번 놀랐다.
우암과 달리 실사구시를 바탕으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긴 유배생활을 한 다산이 짧은 기간이나마 이곳에서도 유배생활을 했었다니 감개무량했다.
자료를 보면 우암이 심었다는 은행나무는 고사하고 그 나무에서 싹이 돋은 나무가 현존하며, 수고 20m, 가슴높이둘레 2.5m, 수관 폭이 8m, 수령이 320여 년이라고 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심은 나무가 원래는 2그루였던 것 같고 1그루는 죽었지만 1그루 살아남은 것이 지금의 나무가 아닌가 여겨진다. 수세가 약하고 그나마 원줄기에서 2개의 가지가 나와 경관적인 면이 다소 떨어지나 운동장을 조성하면서 자라든 곳을 낮춘 결과 뿌리가 손상을 입었고, 수분과 양분공급에 차질이 있어 그런 것 같다. 그러나 그토록 핍박(逼迫)했던 남인의 나라에서도 위세를 꺾지 않으려는 듯 하늘 높이 가지를 뻗고 있어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2001년 ‘우암 송시열선생 사적비건립추진위원회’에서 세운 사적비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남인의 집권과 동시에 실각하여 처음에는 덕원으로 유배되었으나, 1675년(숙종 1년) 69세 되던 해 윤5월 이곳 장기로 옮겨와 무려 4년여를 보내고 1679년(숙종 5) 4월 그의 나이 73세 때 거제도로 다시 유배지를 옮겼다. 우암은 두 동생과 시중을 드는 여자, 사내종과 함께 와서 오도전이라는 선비 집에 위리안치 되었다. 그 후 아들과 손자, 증손자도 합류하여 함께 생활했다. 우암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운 집주인이었던 오도전은 나중에 향교 훈장이 되었다. 선생이 장기를 떠난 후 오도증, 이석증, 황보헌 등 지역의 선비들이 그를 기리는 죽림서원(竹林書院)을 세웠다.
우암이 장기에 머문 것은 본인으로서는 불행한 일이었으나, 장기에 문풍을 진작시키고, 중앙정계의 흐름을 소상하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노론인맥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저술인 <주자대전차의> <이정서분류> <정포은선생신도비문> 등은 이곳에서 쓰였다. 또 한적하기만 하던 고을이 우암을 찾는 기라성 같은 인물들로 붐비고 장기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우암 선생이 장기고을의 발전에 끼친 큰 음덕을 잊지 아니하고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의 협조로 사적비를 세운다.”
우암이 이곳으로 유배를 온 것은 대구 출신 유학자 도신징이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의 장례(葬禮)문제를 두고 올린 상소 즉 2차 예송논쟁에 패해 남인이 집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두 동생과 시중드는 여자는 물론 아들과 손자 심지어는 노비까지 데리고 와 마치 전원생활을 하듯 호사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당대 최고 실력자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반면에 1801년(순조 1)에 일어난 신유박해로 유배 온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5)은 불과 7개월 머물었을 뿐이지만 어민들이 칡넝쿨을 쪼개 만든 그물로 고기를 놓치는 것을 보고 무명이나 명주실을 이용해 그물을 만들고 그 것이 썩지 않도록 소나무 삶은 물에 담갔다가 사용하기를 권장하는 치밀함을 보였다고 한다. 지리적인 특수성 때문인지 장기에는 이들 두 분 이외에도 대사간 양희지(楊熙止),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등이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비에 젖고 있는 장기초등학교를 나와 구룡포에서 명물 전복죽으로 끼니를 때우고 기청산식물원으로 향했다. 한 평생을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이삼우 원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투박하지만 고풍스러운 오래된 목조, 야외 찻집에 앉아 낙수 물 소리를 들으며 장작불로 덥힌 차를 마시는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빗물로 가랑이가 젖는 불편함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새로 조성한 연지(蓮池)며, 약초원을 보여주는 수고를 해 주었다. 날씨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여 경북수목원 방문은 뒤로 미루고 대구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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