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개조 의상대사를 기리는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의 선비화(오른쪽 편의 철책 속에 감춰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목조건물로 알려진 국보 제18호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으로 잘 일려져 있다
선비화라 불리는 골담초 꽃이 피기 전의 모양이 버선을 닮아 버선꽃이라고도 한다.
지난번 포항시 장기면 송시열나무와 기청산식물원 답사에 동참했던 이(李) 사장과 함께 강원도 평창에 있는 ‘한국자생식물원’을 찾았다. 간밤에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바람이 그리도 많이 불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아침은 파란 하늘이 보여 자연의 조화라고 해도 이렇게 달리 변할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장마 끝에 오는 청명한 날씨가 여행의 즐거움을 미리 예고해 주는 것 같았다. 8시 30분 대구를 출발하여 12시 30분 평창 오대산 입구에 도착했다. 미리 점심을 먹으려다 식물원 견학부터 먼저 하기로 했다. 10여 년도 더 지난 날-이 곳 자생식물원장이 식물원은커녕 솜다리 (일명 에델바이스로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제곡에 등장하는 고산지역의 식물), 구절초, 도라지, 용담 등 몇 가지 야생화를 키워 팔든 시절- 대구에서 개최되는 전국체전을 앞두고 이왕이면 시가지 조경을 기존에 심어왔던 폐튜니아, 셀비아 대신 우리 꽃으로 차별화 하고 싶었다. 그 때 야생화 생산자로 만났었다. 당시로서는 거래처의 큰 고객이었기에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반면에 조달청에 등록되어 있지 아니하고, 제품에 대한 규격도 마련되지 아니하여 상업적으로 판매하기 위해서는 일선 공무원들이 손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조달청에 등록하고, 분얼(分蘖)등으로 규격화할 것이며, 뿌리체로 뽑아 그냥 팔 것이 아니라 폿트에 재배해 한다는 등 영업활동에 도움이 되는 많은 조언도 해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은퇴하여 그럴 입장이 아니기 때문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구경을 하였음은 물로 원장(院長)을 만나지도 아니하고 돌아 나왔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식물원에는 원추리, 동자꽃, 백리향 등 몇 종의 야생화만 필뿐 다소 썰렁했으나 방문객은 훨씬 많았고, 전시실과 편의시설도 크게 보강되어 성공(?)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점심은 그 곳의 명물 산채 비빔밥으로 대신했다. 시계를 보니 2시 30분,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 국도를 이용해 영주 부석사(浮石寺)로 가기로 했다. 네비게이션이 구식이고, 운전을 하는 이 시장도 초행이라 혹은 딴 길로 들었다가 다시 돌아나오기를 하는 등 해가 서산으로 상당히 기운 5시 30분 목적지인 부석사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전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천년 고찰, 흔히 ‘해동화엄종찰(海東華嚴宗刹)’로 불리는 부석사의 입구 가로수는 불교와 배치되는 은행나무라 못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느티나무나 단풍나무가 중간 중간에 뉘처럼 섞여 통일성이 결여되고 정돈감 마저 없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 속인처럼 그런 하찮은 문제에 억매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아 괜한 걱정임을 내 어찌 모르랴. 사천왕문을 지나니 큰 보리수가 나와 이런 나무로 가로수로 했으면 절의 품격이 더 높아지리라 하는 생각을 했다.
배흘림기동으로 잘 알려진 무량수전(국보 18호)을 촬영하고 의상 대사가 비와 이슬도 안 맞는 처마 밑에 꽂아 놓은 지팡이가 싹이 돋아 천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자라고 있다는 기이한 나무 선비화(禪扉花)가 있는 조사당(국보 19호)으로 향했다.
아주 촘촘한 철망을 둘러쳐 놓아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선비화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직경(뿌리 부분) 1~2cm정도의 줄기가 다섯 개, 한 줄기에서는 곁가지가 두 개 나와 모두 7개의 줄기가 솟은 것처럼 보였다. 스님이 부석사를 창건한 676년부터 열반하신 702년 사이에 심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니 무려 1,300여 년을 살아온 나무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골담초(骨膽草)로 불리는 이 선비화가 그처럼 오랜 세월 버텨낼 수 없는 상식을 뛰어 넘어 자라며, 더 나아가 한 해 1mm를 자란다고 가정하면 1,300mm 즉 1.3m 굵기는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1~2cm 정도에 불과하니 도대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선비화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 위한 작업에 참여했던 모 교수에 의하면 한 줄기가 계속해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란 줄기는 죽고 그 옆에서 또 다시 가지가 나와 자라는 반복적인 현상인 것 같으며, 비록 비를 맞지는 않는다 하드라도 처마 밖으로 뿌리를 뻗어 땅속의 습기를 빨아드리며, 특히 황사현상을 막기 위한 국제회의에 참가했을 때 중국 측 학자가 작성한 사막녹화사업에 심을 나무 목록에 이 나무가 들어 있어 건조(乾燥)에 견뎌내는 힘이 강한 식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경이로운 현상 임에는 틀림없다.
조선시대 인근 예안에 살고 있던 퇴계 이황(1501~1570 )이 부석사를 찾아 이 나무를 보고
빽빽하게 빼어난 옥 같은 줄기 절문에 기대니
지팡이가 신비하게 뿌리를 내린 것이라 중이 말하네.
지팡이 머리에 조계의 물이 있어서
건곤의 비와 이슬 은혜를 빌리지 아니했네.
라는 시문을 남겼다. 다시 말해서 바싹 마른 지팡이지만 부처님의 조화가 있어 다시 싹이 돋고, 비와 이슬 등 자연의 혜택을 받지 아니하여도 잘 자라는 것이 신기하다고 했다.
선비화를 심은 의상(625~702)은 우리나라에 화엄종(華嚴宗)을 도입한 스님이다. 그는 우리백성들을 화엄세계로 끌어들여 마음의 평화를 얻도록 하기 위해 해인사 등 전국의 이름 난 곳에 소위 ‘화엄십찰(華嚴十刹)’을 지었을 뿐 아니라, 그 이외 전국의 곳곳에 많은 절을 세워 오늘 날에도 화엄의 맥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화엄의 맥(脈)이자 뿌리인 이 선비화를 부석사 한 곳에서만 잠금 장치를 하여 소극적으로 보호만 할 것이 아니라 대량으로 번식시켜 스님이 창건한 국내의 모든 절에 보내 ‘지구상의 모든 사물과 모래알 하나에 이르기까지 내 몸의 일부가 아닌 것이 없다.’는 화엄사상이 현세에서도 꽃 피우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산문(山門)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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