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효증이 선정을 배풀고 임기를 마치고 돌아 올 때 군민들이 선물한 330 여 년 생의 측백나무,
고귀한 그 선물이 기력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아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상단부후게목 양성이 시급하다.
은퇴 후 책을 읽으며 후진을 양성했던 만연당
그날은 행운이었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에 조선 중기 올 곧은 선비 서암(西巖) 여효증(呂孝曾, 1604~1679)이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 장암, 세도, 충화, 양화면 일대에 있었던 임천군의 군수 직을 마치고 떠나 왔던 1668년(현종 9), 주민들이 측백나무 한 그루를 선물한 것을 오강에 담아 와서 심은 나무가 339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라고 있어 이를 보기 위하여 현지에 들렀을 때 직계후손 수일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답사를 나섰다가 문이 잠겨 있거나 아무도 만날 수 없어 쩔쩔 맺든 절박한 상황을 많이 경험한 나로서는 기쁘기 한량없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이런 일을 미리 막기 위하여 이곳이 고향이자 같은 직장에서 오래 동안 함께 근무했던 박세태님과 그의 친구 최대석님에게 안내를 부탁했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나무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를 뿐 아니라, 관계되는 분도 섭외(涉外)를 해 놓지 않아 당황하고 있던 처지였기 때문이다.
수촌리의 측백(側柏)나무는 문화재(경상북도기념물 제49호)도록을 통해 본 것보다 훨씬 컸으나 생육상태가 말이 안 될 정도로 처참했다. 한 때, 대하증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가지를 자르거나 돌멩이를 던져 끊어 가 수난을 당한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래서 그런 것만 아닌 것 같았다. 바닥에 자갈을 까는 등 보호에 정성을 기우린 흔적이 역력하나, 25미터의 줄기는 썩고 있는 중이고 5가지가 뻗었으나 4가지는 모두 마르고 1 가지만 겨우 목숨이 붙어 있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과도한 공납(貢納)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버리고 도적이 되는 사람이 허다했던 당시 한 목민관이 진심으로 임천군민들을 보살피자 그에 대한 보답으로 선물한 증표(證票) 즉 측백나무가 언제 멸실될지 모를 위급한 상항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의아한 점은 느티나무나 은행, 회화나무 등 오래 자랄 수 있는 흔한 장기수들을 놔두고 하필이면 희귀한 측백나무였을까? 하는 점이다. 그 까닭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 몇 가지 사유가 아니었을까 한다.
첫째 훌륭한 관리에게 잘 어울리는 나무라는 점이다. 세조가 속리산 입구의 소나무에 정이품이란 벼슬을 주었듯이 중국에서는 나무에 사람들과 같은 공·후·백·자·남 등의 작위(爵位)를 주었는데 가장 격이 높은 나무는 나무 목(木)변에 공경할 공(公)자를 붙여 공(公)의 작위를 준 소나무(松)이고, 다음은 백(柏)이라는 작위를 주었던 측백나무였기에 고을 사람들이 나라를 대신해 백작(伯爵)의 품격에 해당하는 측백나무를 선물했을 것이아닌가 하는 점이고
둘째 조선시대 관들의 비리를 조사하여 척결하던 기관 사헌부(司憲府)의 별칭이 측백나무를 상징하는 백부(柏府)였던 바 사헌부가 감찰할 필요가 없을 만큼 청렴한 관리라는 뜻에서 선물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셋째 장수를 상징하는 나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중국 한나라 성제(成帝)시절 어떤 사냥꾼이 온몸에 검은 털이 나고 나무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사람을 종남산에서 잡았는데 알고 보니 200여 년 전 진(秦)왕 시절 적이 궁중을 습격했을 때 산으로 도망친 궁녀임을 밝혀내고 그 녀가 오래 살고, 옷을 입지 않고도 추위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소나무와 측백나무 즉 송백(松柏)의 잎과 열매를 따 먹고 살아 온 것으로 밝혀냈고, 또한 백엽선인이라는 사람은 8년 동안 측백나무의 씨와 잎을 먹었더니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더워지고, 종기가 돋아나 차마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가까이 오는 사람이 없었는데 몸을 자꾸 씻었더니 종기가 깜쪽같이 사라지고 이목이 수려해지면서 광채가 나고, 머리가 검게 되고 몸이 날아갈듯이 가벼워졌다고 한다. 군민들은 이러한 옛 이야기처럼 서암 선생이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주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필자의 추측일 뿐 하고 많은 나무 중에 왜 측백나무이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청렴한 관리 서암 여효증은 1604년(선조 38)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23세 되던 해 이웃 인동 출신 여헌 장현광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5년(인조 13)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부귀와 공명에 대한 욕심이 없어 권세 있는 집에는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따라서 40여 관리생활 중에서 예조·형조정랑 등 주로 내직에 근무했고 외직으로는 전라도도사, 고성현령, 청주판관, 선산부사 등을 지냈다. 고성에서는 송덕비가 세워지고, 임천에서는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으며 유임을 원했다.
만년 고향에 돌아와서는 만연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며, 스승 장현광을 천곡서원에 모시는 일을 주도했고 글씨를 잘 써서 환훤당 김굉필 선생의 신도비 전자(篆字)를 썼다. 1679년(숙종 5) 76세를 일기로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등 격변의 시대를 살다가 돌아갔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냈으나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였기에 가난을 면치 못했다.. 저서로는 서암집(西巖集)이 있다.
나는 후손 수일님에게 두 가지 일을 부탁했다.
하나는 씨를 받든지 삽목을 하든지 서둘러 후계목(後繼木)을 양성해 고사(枯死) 후를 대비할 것과 둘째는 가문을 상징하는 나무로 삼아 사당 등에 많이 심을 것이며 아울러 후손들도 한 가정에 한 그루를 심어 훌륭한 선조의 정신을 측백나무를 통해 이어 받도록 하는 일이라고 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그가 이런 일을 하기에 적합한 실력을 갖춘 분이라는 점이다. 우리 나라 농업을 기계화하기 위해 경지정리사업을 시작했을 때인 1979년, 성주 안포들이 전국에서 최초로 완공하게 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한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 때 이미 명성이 높은 성주 참외 생산을 칭찬하면서 이왕이면 귀빈 접대용으로 전량 외국에서 수입해 오는 스페인 멜론을 재배해 외화를 절약하고 농가소득을 올리는 방안을 강구해 보라고 군수에게 지시했을 때 당시 모범농민이었던 수일씨가 뽑혀 그 일을 담당했다는 것이다.
재배에는 성공했으나 6개월 이상 보관을 할 수 없어 실패했다고 한다. 요사이처럼 저온저장시설이 많이 보급되었다면 성공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일깨워주어 고맙다는 말도 기뻤지만 30여 년 전 불과 몇 푼의 외화(外貨)를 아끼려고 노력한 박 전 대통령의 애국심을 이 시골에서 확인하는 순간도 매우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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