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일본인 귀화 장수 김충선이 살고 있는 대구 우록마을

이정웅 2008. 7. 30. 18:46

 

 귀화 왜장 김충선을 기리는 녹동서원

 김충선 사당

 김충선 사적비

 증 병조판서 교지

 최근에 준공한 한일우호관

 묘지주변 지도

 일본 구마모토 사람들의 덕동서원 방문

김충선 장군 영정(부분)

 

귀화 왜장 김충선과 대구

 

 

대구가 다른 도시와 다른 특별한 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임진왜란 중 적군의 장수로 왔다가 우리나라의 문물에 반해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귀화해 일가를 이루어 400여 년을 살아온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성촌이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주인공은 사야가(沙也可)로 아호는 모하당(慕夏堂)이며, 우리식 이름은 김충선(金忠善, 1571~1642)이다. 공은 임진왜란 시 포악하기로 이름 난 가등청정의 우(友)선봉장이었다. 평소 야만국인 일본에 태어난 것에 대해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광인 풍신수길의 조선 침략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마음을 가졌다. 하지만 참전하지 아니하고는 조선에 올 수 없음을 알고 침략군 대열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부하 3,000명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한 공은 수하들에게 무고한 조선 사람을 헤치지 말 것을 당부하고 4월 20일 경상좌병사 박진(朴晉)에게 귀순했다. 이때가 그의 나이 22세 혈기왕성한 청년이었다.

공은 귀순을 청하는 글 즉 <강화서(講和書)>에서 ‘제가 지금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요,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중략) 여기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이다.’라고 했다.

이어 울산·양산전투에 참전하여 며칠 전까지 같은 민족이었던 왜군과 싸워 한 달 만에 무려 78회나 승전하였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공을 불러 무예를 시험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의 벼슬을 내리고 남쪽방면의 방어를 책임지게 했다.

공은 조선의 무기가 열세인 것을 보고 글을 올려 각 진에 당시로서는 최 첨단무기인 조총과 화약 만들기를 건의해 이때부터 조총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공은 새로운 무기인 조총의 기능에 대해 설명하면서 통제사 이순신, 경주 부윤 박의장, 전라도 체찰사 정철 등에게 하루 빨리 많이 만들어 적을 섬멸하라고 했다.

그 해 12월, 진을 경주로 옮겨 이견대, 봉길리, 소봉대 등지에서 300여 명의 적의 목을 베니 도원수 권율 장군과 어사 한줌겸이 함께 장계(狀啓, 임금께 보고하는 문서)를 올려 선조로부터 본관을 김해로 하는 김(金)씨 성과 충선(忠善)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고 자헌대부로 승진되었다.

성을 김씨로 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모래에서 사금(沙金)이 많아 나서 성을 김(金)이라 하고, 본관을 김해로 한 것은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기존의 김수로왕계의 김해 김씨와 달리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고 하며 시조를 김충선으로 하고 있다.

1594년(선조 27) 김응서 장군이 공을 불러 ‘소서행장’, 등 일본 장수들이 함안에서 만나자고 하는데 귀하의 의견은 어떠냐고 묻자’ 그들의 간계에 응하지 말고 계속 싸우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듬해 명나라 지원군에 쫒긴 왜군들이 남쪽으로 후퇴하자 공도 울산에 진을 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1596(선조 29) 부대를 증성(甑城)으로 옮겼다. 적이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성안에 집결시켰다. 공이 부대를 이끌고 적진에 다다르니 때마침 의병장 곽재우, 고경명 등이 와서 10여 일 동안 공격했으나 적장 현소 등이 성을 굳게 지키며 싸움에 응하지 아니하고 가져온 식량도 모자라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1597년(선조 30) 2월 김응서 장군이 편지를 보내 적장 소서행장이 통역을 통해 말하기를 ‘조선과 일본이 화해를 하지 않는 것은 전쟁을 좋아하는 가등청정 때문인바 그가 다시 군사를 몰고 오는데 이 때 격침시키라고 하는데 귀하의 생각은 어떤가?’ 하고 묻자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했다. 그해 8월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오자 사기가 충천한 적장 현소가 왜적을 몰아 추격하자 부득이 김해로 진을 옮겼다.

10월 명나라 원군 마귀제독이 김응서 장군에게 증성에 있는 적을 치라고 했으나 실패했다. 노한 마제독이 군율(軍律)로 김 장군을 처형하려고 하자 그가 나서서 ‘소장이 왜장의 머리를 잘라 올 테니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고 청해 승낙 받았다. 즉시 전장에 나아가 많은 적의 머리를 베어 옴으로 김 장군을 구할 수 있었다.

1598년(선조 31) 1월 마제독의 명을 받고 왜장 의지부대를 증성에서 크게 이겼다. 이 때 경상우도에 있는 적들이 낙동강 하류를 건너서 영산, 창녕, 밀양, 현풍 등지를 다니면서 밤낮으로 노략질 하고 대구, 경산까지 범했다. 도원수 권율이 김응서로 하여금 대구에 진을 치게 하자 그는 밀양에 진을 치고 밀양은 물론 청도에 있는 적까지 토벌했다.

1599년(선조 32) 체찰사 류성룡에게 만약을 대비하여 각 진에 총과 탄환을 보충하고 낡은 무기는 새것으로 바꿀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1600년(선조 33) 공의 나이 30세 지루하게 진행되던 전쟁이 끝났다.

공은 경상도 깊은 골짜기 우록동으로 들어와 진주목사 인동인 장춘점(張春點)의 딸고 혼인하여 세상을 등지고 평소 바랐던 문화민족의 땅인 조선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만주족이 해마다 국경을 침범하여 소란스럽게 하자 공은 글을 올려 방어의 방책을 진술하고 자원하여 10년 동안 국경수비를 담당했다.

1604년(선조 37) 사명당이 정사로 김응서가 부사로 일본을 다녀왔다. 그들이 선발된 이유는 일본이 불교를 존중하고 김응서를 두려워한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613년(광해군 6) 상소를 올려 귀향을 청하니 임금이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며 정헌대부(정2품)로 승진시키고 ‘자원잉방 기심가가(自願仍防 其心可嘉)’ 즉 ‘자원하여 계속 변경을 지켰으니 그 마음 가상하다’ 라고 친필을 써 주었다. 10년 만에 다시 향리 우록동으로 돌아왔다.

1624년(인조 2) 3월 부원수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서울을 침범하자 임금은 공주로 피난하는 일이 벌어졌다. 도원수 장만이 이괄을 죽였으나 부장이자 왜군 출신인 서아지가 잡히지 않고 남으로 도망쳐오자 밀양까지 추격하여 영남루 숲에서 잡아 죽였다. 그 공으로 왕이 서아지(徐牙之)의 땅을 사패지로 주었으나 소를 올려 그 땅을 수어청의 둔전으로 쓰게 했다.

1628년(인조 6) 가훈과 향약을 지어 자손들의 규범을 만들고 마을에 법을 세웠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부름이 있기도 전에 66세라는 노구를 이끌고 주야로 달려 서울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금은 벌써 남한산성으로 피신한지라 광주 쌍령에 이르러 많은 적을 무찔렀다. 적병 500여 명의 코를 베에 자루에 담고 임금을 지키기 위해 남한산성으로 가는 중에 화의가 이루어졌다.

공은 예의의 나라 왕이 차마 개 같은 오랑캐 앞에 무릎을 굽힌 사실에 통곡을 하며 대구의 우록동으로 돌아왔다. 1642년(인조 20) 파란만장한 일생을 이역 땅에서 마감하니 향년 72세였다. 저서로 1798년(정조 22)에 간행된 <모하당문집>이 있고 녹동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상이 <모하당문집>의 연보(年譜) 편을 혹은 빼고 혹은 보태서 정리한 내용이다.

모하당에 관한 내용은 우리나라 중학교 <도덕>책은 물론, 일본의 <고교일본사A>, 시바 료타료의 <한나라 기행>, 고사카 지로의 <바다의 가야금>으로도 소개되고 일본의 공영방송 NHK, 요미우리신문 등이 특집으로 보도했다. 이외에도 많은 일본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으며 해마다 1,000여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그러나 이 문집 어느 줄에도 가족사항 이외 출신지를 밝히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가등청정이 인솔했던 병력이 2만2천 8백 명이었다. 그 중에서 3천명을 인솔한다면 계급이 상당히 높았을 터인데도 출전장수 명단즉 <진립서(陳立書)>에 이름이 없는 점이다.

따라서 조선총독부에서는 <모하당문집>이 위서이며 사야가의 투항자체가 조작으로 단정 지웠다.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도 사야가와 같은 평화주의자가 있었던 점을 강조하기 위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한다.

공에 대한 뿌리 찾기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우선 조총 제조 기술에 능한 점을 근거로 소설가이자 일본의 구식총연구회 고문인 고시카 지로는 전국시대 와카야마현의 ‘사이카’로 불리는 철포부대의 대표 ‘스즈키 마고이치’라고 주장한다. 이곳은 지금도 중화학공업의 중심지이지만 예부터 총포를 잘 다루었으며 그 우두머리가 ‘스즈키 마고이치’인데 조선 출정 후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다음은 <한나라 기행>의 시바 료타료는 사야가가 4월 13일에 조선에 상륙했다는 주장을 근거로 가등청정 소속의 장수가 아니라, 소서행장이 이끌고 온 대마도주 소속의 무사 출신일 것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가등청정은 2번대로 4월 17일에 부산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그가 전쟁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규수지방의 반(反) 토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인 ‘하라타 노부타네’라는 설이다. 가등청정의 직속으로 4천명의 부하를 이끌고 참전해 조선침략 1년 후 울산전투에 전사한 것으로 보고 된 그가 사야가라는 설이다. ‘하리타 노부타네’가 전쟁을 피해 조선에 투항한 것을 숨기기 위해 전사한 것으로 허위로 보고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 증거로 전사자 유족에게 주는 녹봉을 ‘하리타 노부네’ 후손에 대해서는 오히려 삭감하는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즉 가등청정이 풍신수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하의 투항 사실을 숨기고 전사자로 보고했지만 괘심한 나머지 녹봉을 깎아 지급했다는 것이다.

그가 우록동에 정착한 배경에 대해 <녹촌지>에서 “이곳은 반곡(盤谷, 당나라 시인 이원이 은거한 골짜기)이 아닌 반곡 같은 곳이요, 율리(栗里, 도연명이 살던 곳)가 아닌 율리 같은 마을이다. 그 터전 됨이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 물은 깊지 않으나 맑으며, 봉암산(鳳巖山)은 그 동쪽에 있고 황학봉(黃鶴峰)은 그 서쪽에 솟아 있으며 남에는 자양(紫陽)이요’ 북에는 백록(白鹿)이라, 찬 샘물은 그 오른편에서 솟아나고 선유동(仙遊洞)은 그 왼편에 깊숙하다. 대개 봉(鳳)이라는 것은 문명한 상서라 요순과 문왕 때 나타났으니, 봉으로써 바위를 이름 함은 문명한 징조를 볼 수 있음이요, 학이라는 것은 신선이 좋아하는 새라 이적선(李謫仙)의 ‘석인이승황학거(昔人已乘黃鶴去, 당나라 시인 최호의 작품 황학루의 첫 연으로 옛 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나고··· ,이태백이 이 작품을 격찬했다고 함)’ 시구가 있은 즉 산봉우리를 학으로써 이름 한 것은 선인(仙人)이 깃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자양과 백록은 옛날 주부자(朱夫子, 남송의 성리학자 주희)가 도학을 강명하던 지명이니 나의 자손 중에서도 혹 도학을 강명할 사람이 날 것인가? 또 동리 이름이 우록(友鹿)으로 되어 있는 데에 내가 취하는 바가 있으니 산중에 은거하는 사람은 대개 사슴을 벗하며 한가로움을 탐하는 것이라, 우록의 뜻은 내 평생토록 산중에 숨어 살고자 하는 뜻과 부합하나니, 찬 샘물에 마음의 티끌을 씻고 선유의 동혈(洞穴)에서 흰 구름을 비질할 수 있으리라. 그르므로 한 간의 띠 집을 세워서 자손에게 남기노니 이곳이 곧 나의 원하는 땅이다.” 라고 했다.

조선천지 넓은 땅 중에서 그가 우록동에 정착한 이유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으로 많은 시간을 전장에서 보낸 공이 언제 어떻게 이곳을 알아 두었다가 자리를 잡았을까 궁금하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외진 곳이지만 영남대로 변에 있어 1598년 상관 김응서가 대구에, 그가 밀양에 진을 치고 적을 토벌할 때 주요 영남대로의 주요 요충지였던 팔조령을 넘나들며 점지해 두었거나, 남지장사에서 사명당이 승군을 훈련시킬 때 어떤 일로 방문하면서 보아둔 곳일 수도 있다.

고국과 가족을 버리고 스스로 조선에 귀화하고 풍신수길의 무도한 전쟁을 반대하여 동족을 베는 데 앞장섰던 그였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남풍이 때때로 불 때 /고향을 생각하니

조상의 무덤은 평안한가 / 일곱 형제는 무사한가

구름을 보며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과

봄풀을 보며 솟아오르는 생각이 / 어느 때인들 없을 소냐

아마도 / 세상에 흉한 팔자는 / 나뿐인가 하노라

라고 그리움에 젖기도 했다. 그는 20세에 불과한 청년 무장이었지만 출정 전에 이미 높은 경지의 학문을 쌓고 풍수지리에도 밝았던 것 같다. 또한 그의 향약이 대구 최초의 향약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공은 혹시 있을 당파나 타인의 모함으로부터 자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체 글과 유물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모하당문집>이 세상에 나온 것은 그의 사후 200여 년이 지나 상관으로 모셨던 김응서 장군의 후손으로 강원도에 살고 있는 김사눌(金思訥)의 집에서 발견된 것을 출간했다고 한다.

공은 일본에서는 아버지 익(益)으로부터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5남 1녀를 두었다. 현재 7,500여 명 정도의 후손이 대구 등지에 살고 있다고 한다.

묘 터를 잡으면서 후손들에게 이르기를 ‘8세까지는 출세할 생각을 말라. 내가 이곳에 눕고서 350년이 지나면 넓은 세상에 나가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제4공화국시절 김치열(1921~2009)이 내무·법무장관을 지냈다.

공은 비록 귀화 왜장이었지만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괄의 난에 공을 세운 이른바 3란 공신으로 어느 누구보다 더 충성심이 넘치는 조선 사람으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