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이야기

왕건과 견훤의 팔공산(桐藪)싸움 재조명

이정웅 2009. 1. 10. 12:30

 

인인터불고 cc클럽하우스에서 바라본 팔공산 전경, 오른 쪽 뽀족한 봉우리가 초례산이다.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팔공산(桐藪)전투 재조명

 

 

 

 

 

문제의 제기

 

천 년 전 우리나라 역사가 뒤바뀔만했던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팔공산 전투를 살펴봄에 있어 먼저 미리사를 찾는 일부터 시작했다.

왜냐하면 미리사는 의상대사(義湘大師, 625~702)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세운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또는 전주 모악산의 귀신사), 가야산의 해인사, 비슬산의 옥천사(용천사), 금정산의 범어사, 지리산의 화엄사, 계룡산의 갑사, 서산의 보원사, 삼각산의 청담사,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의 한 절이자, 절 앞에서 고려 개국 공신으로 팔공산 전투의 희생자인 좌상 김락이 전사한 곳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리사의 위치만 확인되면 고려 태조 왕건과 견훤의 팔공산 전투를 보다 소상히 알 수 있고 동시에 같은 시기에 창건된 부석사나 화엄사처럼 명소로 만들 가능성도 있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1991년 <대구문화> 4월호에 이미 ‘미리사’를 고찰하면서 그 위치를 동구 평광동 시량리로 비정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필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간행된 <대구시사 (1995)>나 <평산신씨역사유적집 (2001)> 어디에서도 이를 수용하려 하지 아니하고 있어 아쉬웠다.

그러던 차 동구지역혁신협의회가 발족되면서 팔공산 관광자원화에 대한 자문역할을 할 기회가 있었다. 구성원들의 의견이 팔공산의 정체성은 ‘불교문화’와 ‘왕건설화’에서 찾아야한다고 했다.

필자 역시 이 말에 동감하면서 오래 동안 묵혀 두었던 숙제 즉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공산싸움을 다시 한 번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문헌조사와 현장답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팔공산 전투의 전개과정이 여러 문헌 마다 상이하게 한 원인제공은 공교롭게도 정사인 <고려사>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다음은 빈약한 사서의 내용을 이유로 저 마다 상상력을 동원하여 소설을 쓰다 시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 역시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되지만 사실(史實)에 부합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다.

 

<고려사> 태조 10년(927) 9월조를 보면.

 

 

‘왕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신라에)사절을 시켜 조문과 제사를 치르게 하고, 친히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 동수(桐藪)에서 훤(견훤)을 맞아 큰 싸움을 진행하였는데 형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훤(견훤)의 군사가 왕을 포위하여 사태가 매우 위급하였다. 고려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희생되고 각 부대들은 패배를 당하였으며 왕은 겨우 몸만 피하였다.’

 

라고 했다.

 

이 글에 등장하는 동수에 대해서도 <달구벌(1977년 대구시)>에서는 분명히 지묘동일대로 비정(比定)했다. 또한 후손 신흠이 쓴 비문(1607)에도 같았다. 그러나 앞 서 소개한 대구시사(이하 시사)나 문중 평산신씨역사유적집(이하 유적집)은 동수를 동화사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전자 즉 지묘설을 수용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다시 고려사로 돌아가

‘훤을 맞아 큰 싸움을 진행하였는데 형세가 매우 불리하게 되었다. 고려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 희생(犧牲)되고 각 부대들은 패배를 당하였으며 왕은 겨우 몸만 피했다.’ 라고 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이 문장을 자구(字句) 그대로 해석하면 두 장수는 동수 즉 오늘날 지묘동에서 순절한 것이 된다.

 

           1670년(현종 11)에 대장 신숭겸 장군이 순절한 자리에 세워진 표충사

 

 

 

그런데 문제가 다시 불거지는 것은 같은 <고려사>의 그 뒤의 기록이다.

927년 9월 팔공산전투에서 왕건을 패퇴시킨 견훤은 여세를 몰아 10월에는 대목군(칠곡군 약목?)을, 11월에는 벽진군(성주 벽진)일대도 노략질하고, 12월에는 한 통의 편지를 왕건에게 보내는데 내용 일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당신의 군대는 나의 말대가리를 보거나 소털을 뽑기도 전에 초겨울에는 벌써 고려의 도두(都頭) 색상(索相)이 성산 진 아래서 패배하였고 같은 달에 좌상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버렸다. 우리가 죽이고 포획한 것도 많았으며 추격하여 사로잡은 것도 적지 않았다. 강약의 역량이 이와 같으며 승세의 형편은 알만한 일이다. 기도하는 바는 나의 활을 평양의 다락 위에 걸며 나의 말에 패강(대동강)의 물을 먹이는데 있다.”

 

고 하는 부분이다.

이 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은 ‘미리사 앞에서 김락의 해골을 버렸다. 즉 미리사 앞에서 김락을 죽였다.’는 표현이다. 이 글은 두 가지 사실을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첫째는 표현 그대로 미리사 앞에서는 김락을 죽였을 경우이다. 즉 신숭겸과 김락을 함께 죽였다면 두 분의 이름을 다 기명(記名)할 것인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김락만 명기(銘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둘째는 실제로 두 장수가 함께 순절했는데 <고려사>를 찬술한 사관(史官)이 실수하여 한 분만 기명한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내용을 오기(誤記)한 사관의 잘못이 된다. 그러나 역사서 편찬에는 한 명의 사관만 참여하지 않는 것을 감안할 때 실수를 범했다고는 볼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첫 번째 경우 즉 미리사 앞에서는 김락만 전사한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사관의 실수가 아니라, 김락 혼자만 미리사 앞에서 죽었기 때문에 사실 그대로 쓴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김락이 순절한 미리사 위치가 어디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팔공산전투의 전개과정

 

 

우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대구도후부와 영천군의 고적조, 하양현의 산천조를 보면 태조 왕건과 견훤의 팔공산 전투는 동구 지묘동 일대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라, 은해사 입구(태조지)에서부터 지묘동(동수), 평광동 시량리(미리사 앞), 하양과 대구의 접경지 초례산에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태조 왕건 군사와 견훤 군사가 처음으로 조우(遭遇)한 곳에 대해서도 <달구벌>은 동수(지묘), <시사>는 동수(동화사), <유적집>은 태조지(영천)로 각기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영천군 신녕면 은해사 입구의 태조지(太祖旨, 위치 미확인, 운부암 일대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다)로 비정한다. 그 이유는 그곳은 견훤이 경주를 유린하고 영천을 거쳐 팔공산 쪽으로 회군(回軍)하는 길목이자, 개성에서 충주, 문경, 용궁, 의흥, 신령, 영천, 경주를 잇는 주요 교통로로 태조 왕건이 정예기병 5천명을 이끌고 내려오는 가장 빠른 길의 교차지역이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군은 먼 길을 오느라고 지쳐 있는데 비해, 견훤군은 신라를 유린하고 많은 전리품까지 챙겨 사기가 충천해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견훤에게 밀렸던 것이다. 이 후 태조 왕건은 능성재-백안-미대-지묘를 거쳐 무태까지 후퇴와 후퇴를 거듭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첫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견훤은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나팔을 불며(나팔고개,) 뒤따르니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왕건은 무태에서 대오를 정비(신숭겸과 김락이 이끌고 온 지원군의 합류하여 병력이 증강되었다고도 하나 이 또한 사서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한 다음 반격을 시도한다.

양 진영은 살내(箭灘, 지묘천과 동화천이 만나는 곳)를 사이에 두고 쏜 화살이 내(川)를 이룰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했다. 그러나 오히려 왕건군이 대패(파군재)했음은 물론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처지에 이르렀다. 이때 신숭겸장군이 왕건의 어가(御駕)를 타고 견훤군을 유인하는 사이에 왕건은 탈출을 시도하여 왕산을 거쳐 혼자 한 바위(봉무동 독좌암)에 앉았다가 도동 측백나무 숲 앞을 지나 평광동으로 잠입하여 초례산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이 산에 올라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천지신명에게 제사(산 이름 초례(醮禮 )는 이렇게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초례는 혼례를 뜻하기도 하지만, 원래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 이름을 두고 어떤 이는 왕건이 29번째 부인과 혼례를 치러 부쳐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견훤군의 추격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에 혼례를 치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다. )를 올리고 마지막 일전을 각오하고 다시 견훤을 치러 시량리 부근의 미리사 앞까지 진격했으나 아쉽게도 여기에서도 밀려 마침내 좌상 김락 마저 잃는 또 한 번의 비운을 맞는다.

이 부분은 하양읍지의 기록을 참고 했다. 하양읍지 산천조 초례산 편에 의하면 ‘동수에서 견훤을 치고 이 산에서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高麗 太祖 征 甄萱 于 桐藪 登 此山 祭天)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록은 동수(지묘)전 이후 이곳에서 전쟁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 후의 행적은 금호강을 건너 시내로 들어가 앞산일대로 숨어들어 은적사, 안일사, 왕굴, 임휴사 등에서 간간히 휴식을 취하다가 성주를 거쳐 개경으로 복귀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공신의 순절 장소

 

 

이상으로 팔공산 전투의 전개상황은 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대구읍지>, <영천군지>, <하양읍지> 등을 통해 엮어 보았다. 팔공산 전투에서 핵심적인 인물인 대장 신숭겸은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파군재를 포함한 지묘동일대에서 순절(殉節)(대구시 기념물 제1호 신숭겸 장군 유적지 내 순절단 참조)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좌상 김락은 세 번째 전투라고 할 수 있는 평광동 시량리에 소재한 미리사 앞에서 순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물증이 1832년(순조 32) 세워진 신숭겸 장군의 영각유허비(影閣遺墟碑)이다.

이 비(碑)는 장절공의 영정을 모셨던 대비사(大悲寺)가 아전 김철득이라는 사람이 자기 아버지의 묘를 쓰기 위해 스님을 매수하는 간계(奸計)부려 절이 불타 없어지자 바로 그 앞에 세운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역사성을 가진 대비사는 평산 신 씨 문중 자료집과 인근 주민들의 구전으로만 전해올 뿐, 대구읍지 등 어느 곳에서도 기록이 나타나지 되지 않는다.

 

                                                         공산전투 상상도

 

 

 

따라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대비사는 본래 미리사였는데 많이 퇴락했거나 폐사 지경에 이르면서 이름이 바뀌어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점은 태조 왕건이 두 충신을 기리기 위해 지어준 지묘사가 조선조에 와서 폐사되어 신숭겸 장군의 영정을 대비사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 대비사(?)가 팔공산 전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영정을 이 절로 옮겼겠느냐 하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신숭겸 장군은 고려 개국 공신이었던 만큼 그를 기리기 위해 지은 지묘사가 관리부실로 폐사가 되었다면 가까운 동화사나 파계사에도 충분히 모실 수 있는 존경받는 인물인데 굳이 오지 시량리에 있는 대비사를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점이다.

이런 이유로 평소부터 미리사가 시량리에 있었다고 생각해 왔던 필자는 이번 재조사를 하는 과정에 두 가지 결정적일 수도 있는 귀중한 자료를 얻었다. 하나는 1950년대 백안초등학교 교장을 엮임 했던 문보근(文輔根)님이 공산지역 학생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쓴 <우리고장>이라는 책과 두 번째는 <유적집>이었다. 이 두 책에 미리사의 위치가 시량리라는 필자의 주장을 보충할 수 있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문 교장이 쓴 <우리고장>의 제13장 제11절 “실안이(지금의 시량리) 영각 유허비” 편을 보면

 

‘평광동 실안이에 신 장절공 영각 유허비가 있다. 본데 장절공의 명복을 빌기 위하야 대비사(大悲寺)를 지었던 곳인데 뒤에 영각으로 사용하다가 임란에 소실되고 지금부터 20년 전에 유허비각을 재건한 것이다. 동명 음(音을 말하는 것 같음) 시랑이(時良), 설어서(大悲)라 하나 실안이(谷內)가 설어니(大悲)로 화하야 시랑이가 되지 아니하였냐고 생각한다.’

 

라고 해서 오늘 날 시량리는 원래 이름이 실안이(谷內)였으나 이것이 설어서(大悲)로 변해 ‘설어니’를 한자화하면서 슬프다는 뜻의 대비동이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두 번째 <유적집>의 제19장 제3절 “동수전 역사” 제3 독좌암(獨坐岩) 편을 보면

 

‘---왕건은 이곳에서 잠시 후 30 리 떨어진 대구 동구 현 평광동 실왕리(失王里) 모영재(당시 그 곳에는 모영재가 없었다)로 피신하고 있을 때 신숭겸 장군의 순절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였다 하여 대비동(大悲洞)이라 하며 왕건은 다시 해안(현 방촌)을 지나 반야월 안심을 거처 피신하였다고 전한다.’

 

라는 이야기이다.’

위 글 중에서 해석하기 다소 애매한 부분도 있으나 전자는 시량리의 본래 이름 ‘실안이(谷內)가 설어서(大悲洞)’가 되었다고 했으며, 후자는 왕건이 신숭겸 장군의 순절 소식을 듣고 슬퍼서 이곳을 대비동(大悲洞)이라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당시 영각유허비문을 쓴 사람은 대비사가 실제로 있어서 ‘대비사’라는 고유명사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대비동에 있는 절이라는 뜻으로 썼다고 보아진다. 그 절이 비로 미리사다.

필자의 이러한 추론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면 신숭겸 장군의 영정을 처음부터 이 절 즉 ‘미리사’에 모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쟁초기였던 만큼 비록 장절공이 왕을 대신해 순절했다 하드라도 새로운 절을 짓기에는 시간이 부족하고, 재원마련도 쉽지 아니하였을 것이기에 기존의 절 미리사를 활용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러한 관련 문헌과 정황으로 보아 좌상 김락은 평광동 시량리에 있던 미리사 앞에서 순절했으며 신숭겸 장군의 영각유허비문을 쓴 사람은 대비사라는 절이 있어서 대비사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대비동에 있는 절이라는 의미에서 대비사로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신숭겸장군의 전사지가 지묘동이라는 사실은 고려 장절(신숭겸장군의 시호)신공 순절지지(殉節之地)라는 비가 현존하고, 지묘동이라는 마을 이름 역시 훗날 왕건이 자신을 대신해서 순절한 신숭겸장군의 전사지에 지어준 절 지묘사에서 비롯되었으며, 1670년(현종 13) 사액된 표충사 또한 이 절터 위에 지어졌다고 하니 달리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지묘사와 미리사를 같은 절이라고 한 현재 유적지 입구에 놓인 안내판이나 방문객들에게 나누어 주는 홍보물의 ‘문화재 안내’편도 고처 저야 할 내용들이다. 다시 말해서 미리사는 고려 초에 지묘동에 지어진 절이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에 의상대사에 의해 시량리에 지어진 절이다.

팔공산 전투를 보다 깊고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사(正史)인 <삼국사기>나 <고려사>

 

 

                                 대비사 절 터 앞에 세웠다는 모영재

 

 

 

뿐만 아니라, <신증동국여지승람>, <대구읍지>, <달구벌>, <평산신씨역사유적집>, <팔공산자락>등의 신구(新舊)서적은 물론 인근 군·현의 읍지(邑誌), 전설(傳說) 등을 두루 참고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 점을 간과해 오류가 거듭되는 것 같다.

팔공산 전투에서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충신을 통해 애국심을 배울 수 있고, 더 나아가 목숨이 위태로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사리를 잘 분석하여 삼한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태조 왕건의 지혜로움을 배울 수 있다.

 

 

도이장가의 무대 달구벌

 

 

사지(死地)를 벗어난 태조 왕건은 일생일대의 패전에서 죽음으로 그를 지켜낸 두 충신의 은혜를 잊을 수 없었다. 지묘사를 지어 넋을 위로 해 줌은 물론 각기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신숭겸의 아우 능길과 아들 보장(甫藏)에게 원윤(元尹, 16등급 중 10위)이라는, 김락 아우 철(鐵)에게도 역시 원윤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팔관회를 열어 신하들과 즐겁게 놀 때 공신들이 앉은 자리에 두 분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가상(假像)을 만들어 앉히라고 했더니 가상이 일어나서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것은 물론 여러 사람과 춤까지 추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 광경을 지켜 본 태조가 이후 팔관회를 개최할 때에는 반드시 그들을 앉히라고 했다.

1120년(예종 15) 왕이 서경(지금의 평양)에서 팔관회를 주관할 때 짚으로 만든 가상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술을 마시고 춤을 추자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한 신하가 이 두 분은 팔공산전투에서 태조를 대신해서 죽은 신숭겸과 김락의 가상으로, 태조의 유훈으로 참석시킨다고 하였더니 어여삐 여긴 예종이 지은 가사가 두 장수를 추모한다는 뜻의 ‘도이장가(悼二將歌)’다.

 

“임을 온전케 하시기 위한/ 그 정성은 하늘까지 미치심이여/

그대 넋은 이미 가셨지만 /지니셨던 직책을 수행하고자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구려. / 오오 돌아 보건데 두 공신의/ 곧고 곧은 업적은/ 오래 빛 나리소이다.”

 

라는 노래(필자 의역)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동구의 지묘동과, 평광동 일대는 이 노래가 탄생했던 무대가 된다. 또한 이 시가(詩歌)는 향가로부터 고려가요로 변해가는 과도기의 문학작품으로 우리 국문학사(國文學史)에서도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이번 현장 답사를 통해 팔공산 전투의 실상과 미리사의 위치를 재조명해보면서 도이장가의 무대까지 아울러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이런 좋은 문화자원을 우리 지역에서는 묻혀두고 있는데 반해 전남 나주시에서는 지난 2008년 그곳 출신이자 태조 왕건의 두 번째 왕비인 장화왕후(莊和王后)의 일대기를 오페라로 창작해 공연했으며 그 중에서 제4장은 도이장가를 삽입해 활용했다는 점이다

 

 

                               장절공의 피 묻은 투구 등을 묻었다는 순절단

 

 

 

 

맺는 말

 

 

비록 역사를 전공한 학자는 아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팔공산전투의 실상과 미리사 위치를 바로잡아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 결과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태조 왕건과 견훤이 처음 전투를 치른 곳은 북구 무태나 지묘가 아니라, 영천의 은해사 입구 태조지(太祖旨)라는 산봉우리이며

둘째, 팔공산 전투는 지묘동 한 곳에서만 전개되었던 것이 아니라, 은해사 입구-지묘동-시량리 3곳이 주된 전쟁터이자 글의 순서와 같이 전개되었고.

셋째, 미리사는 대장 신숭겸을 위해 지묘동에 지은 지묘사(智妙寺)와 달리 의상대사가 화엄시찰의 하나로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절이며 위치는 시량리이다.

넷째, 대장 신숭겸은 지묘에서 좌상 김락은 시량리에서 순절했고.

다섯째, 신숭겸 장군의 영정을 모신 절은 대비사는 곧 미리사이고

여섯째, 왕산은 지금 지도에 표기된 산이 아니고 파군재를 안고 있는 산이며

일곱째, 태조 왕건이 무태 쪽에서 진출해 가다가 은해사 앞에서 패(敗)해 갔던 길을 되돌아 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은해사 앞에서 패해 능성재-백안-지묘-무태 쪽으로 후퇴했다.

팔공산 전투는 운주(지금의 홍성)전투, 병산(지금의 안동)전투와 함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 있었던 3대전투의 하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팔공산 전투에서는 태조 왕건이 대패했지만, 다른 두 곳에서는 승리해 결국 삼한을 통일했다. 패한 원인을 두고 일부 학자들은 당시 동화사가 백제영토의 김제출신 진표율사가 개창한 법상종(法相宗)계열의 절이라서 스님들이 견훤 편에 가담해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추측일 뿐 직접적인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동화사는 오히려 친 신라계의 호국성 성주 이재(異才)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또 하나 이번 기회를 통해 바로잡을 필요가 있는 것은 태조 왕건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곳곳의 지명(地名)들이다.

오래된 일이고 정사에 기록된 것도 아니며, 단지 읍지(邑誌)나 구전에 의해 전해오는 이야기인 만큼 정확히 밝힌다는 것은 사실 상 불가능하다. 그나마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 시민들에게 흥미를 자아내게 한다면 그대로 인정해도 좋을 곳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이었던 만큼 사실과 가장 가깝게 접근해 볼 필요성은 대두된다.

<유적집>에 등장하는 애수(礙藪), 즉 견훤군으로부터 위급한 태조를 숨겼다는 곳은 같은 책에서도 부인사(81쪽)라 했다가, 덤불(91쪽)이라 했다가, 미리사(97쪽, 365쪽)라고 하는 등 페이지마다 서로 달라 특정지역으로 확정하기 어렵고, 염불암 뒤의 일인석(一人石)의 경우에도 <대구읍지>에서 왕건으로부터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나, 전투가 전개된 상황으로 볼 때 적의 배후지 깊숙한 곳이어서 무리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묘동과 파군재 일대에서 패한 왕건이 역방향인 그곳까지 탈출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고, 양 측이 쏜 화살이 내를 이루었다는 살내(箭灘) 역시 <달구벌> 등 여려 곳에서 동화천과 금호강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하나 <대구읍지>를 보면 북쪽 20리라고 하여 왕산 옆 지묘천과 동화천이 만나는 곳이며, 연경(硏經)마을 역시 태조가 이곳을 지나갈 때 글 읽는 소리가 낭랑(朗朗)해서 부친 이름이라고 하나, 조선조에 지은 연경서원(硏經書院)이 있던 곳이라는 데서 비롯되었으며, 해안(解顔) 역시 포위망을 벗어나 긴장했던 얼굴이 풀려 지어진 곳이 아니라,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이곳에 설치되었던 현(縣)의 이름이다.

팔공산 전투는 개전 초부터 태조 왕건이 밀렸기 때문에 전 구간 구간이 모두 도주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도주로(逃走路)라고 하는 말을 대신해 탈출로(脫出路)로 부르기로 한다.

왕건이 위기로부터 탈출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듯이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위기로부터 탈출하여 잘 사는 나라로 만들자는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금호강을 건너 몸을 숨긴 앞산 쪽을 제외하고 현재 답사가 가능하고 비교적 흔적이 뚜렷한 곳을 골라 은해사에서 퇴각했던 길과 반격을 시도하다가 패해했던 곳과 탈출했던 길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퇴각로 : 태조지- 능성고개 -백안 -지묘-나팔고개-무태

반격했던 즉 전투를 전개했던 곳 : (나팔고개)- 살내-지묘-왕산-파군재

탈출로 : 독좌암-(도동)-신숭겸장군영각유허비(미리사지)-초례산-------(앞산)

*( )반격 또는 탈출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

 

 

도이장가(悼二將歌)의 두 주인공인 신숭겸과 김락은 고려 건국의 일등공신들이다. 그 분들의 현명한 대처가 없었다면 그 뒤의 역사는 견훤에 의해 쓰여 졌을 수도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팔공산은 나라를 지켜낸 호국의 산이다.

팔공산은 이런 역사자원만을 가진 산이 아니다. 한국불교를 개혁시킨 보조국사 지눌이 정혜(定慧)결사를 한 산이요, 김유신이 기인으로부터 삼국통일의 비법을 전수 받은 산이요, 동식물의 종 다양성이 높은 생태적으로 건강한 산이다.

동구지역혁신협의회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60여 명의 예술인이 이 산자락에 보금자리나 작업실을 마련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문학, 건축, 미술, 조각, 공예 등 장르도 다양하다고 한다. 팔공산의 아름다움과 이분들의 영혼이 결합하여 세기를 빛내는 예술가들이 탄생하는 공간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요즘 전국적으로 붐이 일고 있는 호국정신이 깃든 올레길이나 산악자전거길 등으로 개발하는 방안과 미라사지에 대한 학술조사도 강구해 보았으면 한다.

또한 초례산을 두고 산보다 격이 낮은 초례봉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 역시 초례산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참고문헌

<저서>

전영권 2003 전영권의 대구지리 도서출판 신일 대구

신용철 2004 평산신씨역사유적집 대영서원 충북

대구광역시 2005 대구시사 대구시사편찬위원회 대구

 

<고문헌>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민족문화추진회(1996)

국역 대구읍지 대구광역시(1997)

국역 고려사 사회과학원 고전연구소(1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