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사충과 고산서당 | ||||||||||||||||
독산(獨山)은 불가장지(不可葬地)라 하여 묘를 쓰지 않는다. 들판에 우뚝 서 있어 바람을 막을 수 없다. 사면팔방으로 몰아치는 바람은 생기(生氣)도 휘몰아간다. 더욱이 이런 곳은 지기(地氣)가 이어지지 않았을 확률도 높다. 지기는 일반적으로 용맥(산줄기)을 타고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기를 중시하는 음택은 이런 곳을 아예 묘터 후보에 거론치도 않는다. 하지만 독산 내에 사신사가 구비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충분히 명당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의 산세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대구시 수성구 성동에 있는 고산서당 터가 그러한 자리다. 독산인 고산(孤山)은 자체적으로 내청룡과 내백호를 뻗어 혈을 보호하고 있다. 비록 백호가 조금 짧은 듯해 아쉬움이 있지만 대신 청룡이 길게 뻗어 안(案)을 형성한다. 앞으로 흐르는 남천도 터를 보듬고, 조산인 팔공산 초례봉은 단아한 필봉(筆峰)의 모습을 띤다. 그 무엇보다 이곳은 혈장이 뚜렷하고 후덕하다. 이 고산사당 터는 두사충이 생전에 자신이 묻힐 장소로 택했던 곳이다. 전쟁터에서 지형을 보고 진을 치는 참모로 활동했을 정도로 이름 높았던 명풍수가 잡은 자리, 그러기에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풍수학계에서 회자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그의 유택은 다른 곳에 있다. 이설(異說)이 있지만 그 사연도 명풍수답게 풍수적이다. 그는 죽음을 얼마 앞두고 아들과 함께 미리 보아둔 묘터, 즉 고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했던 몸이라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되돌아와야 했다. 그곳이 지금의 담티고개라 한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아들에게 오른쪽 형제봉을 가리키며 ‘저 산 기슭에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그 유언을 따라 뒤에 아들이 그 자리에 묘를 쓰니 현재의 묏자리가 된다. 두사충 묘의 주산은 형제봉이다. 멀리서 봐도 우뚝하니 아주 아름다운 산이다. 주산으로 전혀 손색이 없다. 비슬산에서 나온 형제봉의 이 용맥은 두리봉을 거쳐 담티고개를 지나 형제봉에 이르러 갑자기 방향을 튼다. 이른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이다. 자기가 지나온 산들을 다시 돌아본다는 의미다. 이런 지세는 힘이 넘친다고 본다. 웬만한 힘으론 가던 방향을 멈추고 꺾을 수 없다는 논리다. 보국(保局) 또한 수려하다. 부드러운 주위의 산들이 모두 정겹다. 그러나 당판에 와선 다소 미흡한 감이 든다. 혈장(穴場)이 분명치 않고 내룡(來龍)도 펑퍼짐하단 얘기다. 하지만 입수맥의 단단한 토질은 명당의 조건에 부합된다 하겠다. 두사충 묘 옆엔 낡은 신도비가 하나 서있다. 마지막 구절은 ‘삼도통제사 이인수찬'(三道統制使 李仁秀撰)이다. 이인수는 이순신의 7대손이 된다. 두사충은 이순신과도 친교가 깊었다. 이순신의 처음 묘터도 그가 잡았다 한다. 전쟁터에서 맺은 선조들의 인연, 그 아름다운 인연을 후손들이 이어간 셈이다. 하국근 희실풍수·명리연구소장 chonjjj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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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03월 2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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