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二國통일에 그쳐" 경북대 명예교수 문경현 박사 | ||||||||||
문 박사는 역사학 분야의 저명한 원로학자다. 경북대 사학과 명예교수인 그는 1955년 경북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한 후 2000년 8월 퇴임 때까지 역사 연구라는 외길에 평생을 바쳤다. 경북대 인문대 학장과 교무처장을 지냈고 1996년부터 2년간 일본 시마네 국제단기대학에서 한국사와 한국어를 가르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했다. 노학자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양쪽 다리가 불편했다. 하지만 2층 서재에 앉아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는 모습에는 열정과 정력이 넘쳤다. “오늘(29일) 대구박물관에서 대구경북 원로교수모임 초청으로 특강을 하고 돌아왔어요. ‘우리 문화의 원류 - 신라’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는데 제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더군요.” 강연 요지는 대략 이랬다. 신라는 삼국통일이 아니라 이국(二國)통일을 하는데 그쳤지만, 현재 우리 문화의 뿌리와 몸통을 이뤘다는 것. “고구려 땅은 대부분 당에 복속됐고 인민들 대부분도 당나라로 떠났어요. 하지만 우리 말에 아직까지 신라어가 남아 있다는 건 신라 문화의 우수성을 말해주는 거지요.” 계곡을 ‘실’, 소나무를 ‘솔’, 돼지를 ‘도치’로 부르는 건 신라어다. 그의 서재에서 진행된 역사 강의에는 거침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그렇게 안 배웠는데요’라고 몇 번이나 되물었는지 모른다. 그는 실록과 사료를 근거로 잘못 알려진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검증했노라고 말했다. 문박사는 단종 애사의 허구와 사육신 성삼문의 잘못 알려진 이야기를 바로잡으며 열변을 토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선덕여왕과 모란꽃 설화의 허구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한국사에서 가장 명문가는 어느 집안인가를 얘기할 때는 아이들처럼 눈빛이 반짝였다.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미워했다지만 실록과는 다른 얘기입니다. 왕방연이 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도 틀린 내용이에요.” 그는 세조가 전국에 금주령을 내렸을 때도 단종에게만은 마음대로 술을 주라고 했고, 단종을 사사하라는 주변 신하들의 거듭된 상소를 막아내며 단종을 돌봤다고 전했다. 단종은 그의 숙부인 금성대군과 장인이 복위를 추진하다 발각돼 죽게 되자, 이를 비관해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다. 신라 왕조를 이룬 경주 김씨의 시조, 김일제가 흉노의 태자였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김일제는 중국 한나라 황제인 무제로부터 ‘김씨’ 성을 받았으며, 문무왕 비문에 이런 사실이 적혀있다는 것이다. 청백리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세종때 정승을 지낸 류관은 섬돌에 막걸리를 떠놓고 손님을 대접했을 정도로 빈한한 삶을 살았어요. 그가 죽었을 때는 세종이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위문할 정도였지요.” 연안 이씨, 달성 서씨, 광산 김씨, 덕수 이씨 등 이른바 ‘4대 명문가’ 중 최고 집안은 어디일까. 문 박사는 “네 집안 모두 대제학과 정승을 몇 대에 걸쳐 배출한 최고의 명문가임에 틀림없다”면서 “하지만 정조가 ‘무예와 학문의 인재를 배출했고, 역적까지 나지 않았으니 이만한 가문이 없다’면서 가리킨 게 바로 덕수 이씨였어요. 이순신과 율곡 이이, 이식(한문학)을 배출했으니 그럴밖에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설파한 공자가 본인은 물론 자신의 아버지와 아들 대에 이르기까지 3대가 이혼을 한 아픈 가문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역설적이냐고 했다. 그런 공자가 가정의 불화를 딛고 성인으로 추앙받는 학문적 성취를 이뤘으니 또 얼마나 대단하냐고 했다. 문 박사의 해박한 역사 지식은 문화재 등에서 오역된 비문이나 한자를 바로잡아 주위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12월 경주 박물관 기념식에 갔다가 성덕대왕 신종 비문의 잘못된 해석을 세 군데나 발견했다. “왕후(王后)라는 글자를 있는 그대로 해석하면 잘못이에요. 后도 왕을 가리키는 말이었어요. 따라서 왕후란 왕비가 아니라 임금, 즉 혜공왕을 의미하고 있어요.” 제주도박물관에서 만난 조정철(정조대 인물)의 문집에서도 오류를 찾아냈다. 조정철은 제주 유배시절 자신을 위해 목숨을 던진 기생 홍랑의 지조를 칭송하면서 비를 지었다. “오두(烏頭)를 까마귀 머리, 쌍궐(雙闕)을 두 대궐이라고 해석하니 말이 될 리가 있나요. 오두는 무덤 머리, 쌍궐은 무덤 앞의 두 돌기둥이라는 말이에요.” 노학자는 요즘 이런 숨겨진 우리의 역사를 한 편 한 편씩 쓰는 일에 오전 2, 3시까지 매달리고 있다고 했다. 역사하면 복잡한 연표부터 떠올리는 독자들에게 역사가 사실은 얼마나 재미있는 학문인지 알려주고 싶노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매일신문에 역사 칼럼을 기고할 예정이다. “벽초 홍명희와 동향(충북 괴산)으로 어릴 때 그의 아들과 한 동네(충북 괴산)에 살았던 덕분으로 문사철(文史哲)에 뛰어난가 보다”고 말하며 이 노학자는 어린애처럼 싱글벙글 웃었다.
최병고기자 cbg@msnet.co.kr Copyrights ⓒ 1995-, 매일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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