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인물

사람만이 희망이다

이정웅 2009. 5. 1. 22:17
사람만이 희망이다
사람이 세상을 다 망쳐 놓았지만 바로잡을 이도 결국엔 '사람 꽃'
 
 
 
여승과 나, 그러니까 그 사이에 '우리'가 된 우리는 벌써 여남은 번째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를 돌면서 담소에 담소를 거듭하고 있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착한 바람이 무수한 솔잎들을 부드럽게 애무하기 시작하자, 줄 없는 거문고 소리가 쏴아~ 쏴아~ 하고 울려 퍼졌다. 그때마다 처마에 매달렸던 청동의 물고기가 허공을 향하여 가볍게 요동쳤다. "그런데 스님!" 스님은 서리 내린 날의 가을 하늘보다도 훨씬 더 깊고 푸른 눈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존재는 아마도 나무가 아닐까 싶고,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가장 거룩하게 느껴지는 나무는 바로 이 운문사의 처진 소나뭅니다. 그러므로 저는 만약에 신이 계시다면 이 처진 소나무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어머, 그런가요. 이거 어쩌지요. 이번에는 거사님과 생각이 다르네요." "어떻게 다릅니까? 어디 말씀 좀 해보시죠."

스님은 한동안 뜸을 들이다가 갓 피어나는 백목련 송이같이 하얗게 웃으면서 입술을 벌렸다. "더러는 실망스럽기도 하고 또 더러는 미워질 때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래도 역시 사람이 제일 사랑스럽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신이 계신다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아니 스님, 신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요? 아무려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 지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동족을 죽이는 것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사람 때문에 생존 그 자체를 위협받고 있고, 따라서 사람이 모두 다 죽는다 해도 장송곡을 부르며 슬퍼해 줄 존재는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제 살판이 났다고 환호작약 뜀박질을 하겠지요. 그러므로 어느 시인은 사람을 가리켜 '가장 잔인하고 흉물스런 짐승'이라 규정하기도 했던 것 아닙니까."

스님은 땅이 꺼지라고 커다랗게 한숨을 쉬고 나서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꽃들 가운데서도 '사람 꽃'이 제일 아름답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저도 모든 사람이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끊임없는 자기 정화를 통하여, 사람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참으로 무섭고도 흉물스런 짐승을 완벽하게 제어한 사람은 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박노해 시인의 '다시'라는 시를 즐겨 읊조리고 있습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사람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스님이 시를 다 읊었을 때, 이제 바야흐로 운문산 위에 두둥실 떠도는 뭉게구름에 저녁놀이 곱게 물들고 있었다. 바로 그 곱게 피어나는 저녁놀 아래 스님의 말씀이 다시 도란도란 울려 퍼졌다.

"사람이 세상을 다 망쳐놓은 것도 사실이지만, 망쳐놓은 세상을 바로잡을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도 역시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사람만이 유일한 희망이 아닐까요?"

스님은 그 형형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참으로 간곡하게 동의를 촉구했고,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 끄덕여 주였다. 그때 따각따각 목어를 치는 소리와 함께, 범종소리가 더응~ 하고 온 천지간에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서로 간에 합장을 하고 말없이 돌아서서 각각 제 갈 길을 향하여 걸어갔다. 한 사람은 종소리가 울리는 곳으로, 다른 한 사람은 그 종소리가 퍼져나가는 저 아득한 바깥,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이종문(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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