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문장처럼 용호서원을 지키고 있는 팽나무
1704년(숙종 30)에 세덕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용호서원 양직당 도성유, 서재 도여유, 지암 도신수를 기린다.
용호서원 유적비
몇 년 전 나는 모 일간지에 대구를 본향으로 하는 성씨들-달성서씨. 달성하씨, 달성배씨, 하빈 이씨 등이 -본관(本貫)을 ‘대구(大邱 또는 大丘)’로 바꿀 것을 권하는 칼럼을 쓴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대구시가 이들 문중유산을 잘 관리해 주고, 사업비를 지원해 주어 타 지역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1년에 단 한 차례라도 시조(始祖)가 살았던 대구를 방문하도록 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이는 많은 자금을 투입하지 아니하고도 대구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도시는 무한경쟁시대에 놓여 있다. 축제를 개최하여 지역민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사회간접자본을 투자해 도시기반을 확충하여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외적으로 홍보를 강화하여 이미지를 제고하는 일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 기업이 광고를 통해 자사제품에 대한 신뢰를 쌓아 매출을 확대하듯이 도시도 이미지를 개선해 역내 제조업이이나 서비스산업이 창출한 제품의 구매력을 높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국적으로 후손들이 흩어져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칠곡향교 부지를 무상으로 기증하여 지역민들의 교육기회 확대에 이바지하고, 달성 십현 중 2명을 배출하여 대구사림사회를 선도하였으며, 국정을 농단한 노론을 무너뜨리는데 앞장섰던 명문 성주도씨(星州都氏)도 예외가 아니다. 고려 개국 때 팔거(八거: 현 칠곡) 의 호족장인 진(陳)이 고려 태조로부터 수성을 하게 된 도씨는 선초(1540년 경) 서재리로 옮겨 470여 년을 세거하였다. 이 곳에는 기세(起世)시조인 순(順)과 3세조 대구파의 유도(有道)와 성주파의 유덕(有德)을 모시는 치경당(致敬堂)이 있어 4월 5일이면 전국의 후손들이 모여 향사를 올리고 있다. 세거지 서재의 지명은 자제들이 대과에 급제하거나 벼슬에 나아가게 된 서재공으로 인하여 부쳐진 곳이다. 대구에는 특정인물로 인해 생긴 지명이 몇 군데 있다. 즉 한훤당 김굉필선생이 공자를 받든다고 대니산(戴尼山)이라 했고, 남인 예학의 대가 한강 정구선생 역시 공자가 거닐던 강에서 따와 사수(泗水)라 한 것이고 서재(鋤齋)는 도여유선생의 아호(雅號)에서 비롯되었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곳은 한적한 농촌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용호서원을 찾은 나는 깜짝 놀랐다. 주변이 변해 단번에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원의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는 나무가 느티나무라고 생각했던 기억과 달리 팽나무여서 더 당황했다. 그러나 굵기나 크기로 보아 새로 심은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문이 잠겨 우왕좌왕하는 일행을 먼발치에서 보았는지 아주머니 한 분이 뛰어오더니 용무를 물었다. 서원을 둘러보고 싶다고 했더니 남편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면서 좀 기다라라고 했다. 사진을 찍는 사이 남편이 도착했다. 일을 하던 중이라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내외분은 종손과 종부였다. 요즘은 낯선 사람들에게 문 열어주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많은데 <용호서원유적지 서재 사적편>이라는 자료집까지 주어 방문객에 대해 아직도 정성을 다하는 도문(都門)의 접빈태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서원은 1704년(숙종 30) 세덕사(世德祠)라는 이름으로 지어져 양직당(養直堂) 도성유(都聖兪, 1571~1649)와 서재(鋤齋) 도여유(都汝兪, 1574~1640)를 기리다가 1780년(정조 4)지암(止巖) 도신수(都愼修, 1598~1650)를 추가 배향했다.
양직당은 어려서는 조선 중기 제일의 문장가라는 성주출신의 송계(松溪) 권응인(權應仁, 1517~?)으로부터 커서는 한강 정구와 낙재 서사원 양문에서 공부했다. 임란 시 낙재가 주도한 창의진에 참여했으며 그가 돌아가자 장례를 주도했음은 물론 유고를 수습하고, 이강서원을 세우는데 앞장섰다. 사림에서 칠곡향교를 지을 땅이 없어 애를 태우자 넉넉지 않는 살림에도 불구하고 세전지를 희사했다. 저서로 <성리정학> <오경체용분합지도> 등이 있으며 달성 십현으로 추대되었고, 서재는 양직당의 종제로 그 역시 어려서는 권 송계 커서는 정 한강, 서 낙재 양문에서 수학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에 창의했다. 저서로 <서재집> 4권 2책이 있다. 추가 배향된 지암은 서재의 아들이다. 29세에 대과에 급제 형·호조좌랑, 충청도도사에 이어 강진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며 사직했다. 그 후 함흥 판관이 되어서는 한 아전이 떠돌아다니는 여자를 제 집에 숨겨 종으로 삼고 그 어미와 오라비를 죽인 사실을 은폐해 여러 해 동안 미결로 남아 있던 사건을 공이 부임하여 진상을 밝히자 고을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했다고 한다. 이어 울산부사를 거쳐 영해부사로 재직하던 중에 병을 얻어 53세 아까운 나이에 별세했다.
이 세분은 성주도씨를 오늘날 명문으로 자리 잡게 한 분들이다. 이외 이력이 특별한 한 분으로 죽헌(竹軒) 도신징(都愼徵, 1611~1678)선생을 빼 놓을 수 없다. 서재의 아들이자 지암의 아우이다.
그가 주목 받아야할 이유는 서인이 중심이 되어 인선왕후(仁宣王后, 효종의 비)의 복상기간을 9개월로 결정한 잘 못을 지적한 상소를 올려 바로잡은 점이다.
죽헌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미천한 신분’의 선비의 주장이었지만 그 위력은 가히 폭발적이어서 그 동안 정국을 주도하던 서인의 영수 송시열 등을 실각시키고 남인을 진출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른 바 2차 예송(禮訟)에서 남인(南人) 승리의 단초가 되었다.
1674년 (현종 15) 7월 6일자에 실린 <조선왕조실록>에 ‘대구의 유학 도신징이 인선왕후의 복상에 대하여 상소하다’라는 기사가 있다. 그는 이 상소문을 접수시키기 위해 60 노구 이끌고 더위를 무릅쓰고 가다가 중도에 병이 나서 한 달여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는 복상기간을 1년으로 해야 하는 이유를 여러 문헌을 인용해 조목조목 밝히고 있어 예학에 매우 정통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깊이가 결과적으로 임금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1년 9월 23일자에서 ‘도신징은 국가에 큰 공이 있으니 종통(宗統)을 바로잡은 것은 바로 이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한 말이 그 것을 잘 증명하고 있다. 그는 이 일로 강릉(康陵)참봉을 제수 받았으며 그 후 주부(主簿)와 용궁현감을 거치며 선정을 펼치자 낭관(郎官, 좌랑 정6품, 정랑 정 5품)에서 l년 만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로 승진했다.
이런 여러 사안을 볼 때 대구에 뿌리를 내린 성주 도문(都門)은 좁게는 지역사회에, 넓게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용호서원 앞의 오래된 팽나무는 그 빛나는 역사를 가슴에 품고 꿋꿋하게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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