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이념은 소금과 같다 너무 많으면 음식을 망친다

이정웅 2009. 7. 24. 22:02

[아침논단] 이념에도 '청정지역'이 필요하다

  •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

"이념은 소금과 같다 너무 많으면 음식을 망친다
한미(韓美) FTA반대, 촛불집회, 인권위원장 취임 반대,
전교조 시국선언 등이 바로 이념 과잉 아니겠는가"

요즈음 이념 때문에 사회분열이 심화되고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이념이란 비유하자면 소금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으나, 그 양은 적정 수준이어야 한다. 너무 많이 들어가면 짜서 먹을 수가 없다. 또 어떤 음식에는 아예 소금이 필요 없다. 빵은 버터를 발라 먹는 것이지 소금을 발라 먹는 것은 아니다.

이념도 마찬가지다. 적정량이 들어가야 할 곳에 너무 많이 들어가고, 전혀 들어가서는 안 될 곳에 듬뿍 들어가면 파열음이 나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은 유럽연합(EU)과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합의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극렬한 반대는 없었다. 이것은 이념보다 경제적 실익의 관점으로 바라보았다는 증거다. 하지만 한미 FTA는 왜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가. 그 이유는 경제적 실익이 아니라 이념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념과는 거리를 두어야 할 먹을거리 문제도 그렇다. 우리는 닭고기나 돼지 삼겹살을 먹을 때 순수한 식도락이나 취향의 문제로 생각한다. 하지만 쇠고기를 먹는 문제는 다르다. 작년 촛불집회 이후부터 호주산을 먹느냐 미국산을 먹느냐 하는 문제는 어느덧 음식의 선택이 아니라 이념적 선택의 사안이 되고 만 것이다. 소고기를 먹으면서 이념을 떠올린다는 것은 생뚱맞은 일이지만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념 과잉의 한 단면이다.

이념의 청정지역으로 남아 있어야 할 곳에 이념이 들어가 오염시키는 곳은 도처에 널려 있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새로 임명되었는데, 진보성향의 일부 단체가 "부적격 임명"이라며 취임식을 가로막고 나섰다. 곁으로 표현은 않고 있지만 이들의 속내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국가인권위는 진보의 영역인데, 왜 진보가 아닌 인사가 임명되었느냐는 문제제기인 것이다.

점거농성자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참으로 딱한 일이다. 야구에서 오른손 타자냐 왼손 타자냐 하며 따지는 일을 본 적이 있는가. 우타자든 좌타자든 공만 잘 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마찬가지로 진보든 보수든 인권 감수성만 있으면 충분한데, 진보인사가 아니라서 인권위 위원장의 자격이 없다고 한다면 전형적인 이념성 편 가르기 주장이다.

전교조도 마찬가지다.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의 배움의 터전인 초·중·고 학교 현장이야말로 이념 청정지역이 되어야 한다. 학교란 좌파이념보다 공동체의 기본적 가치와 헌법적 가치를 배워야 할 곳이다. 그럼에도 전교조는 언제부터인가 이념단체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러다 보니 전교조 교사가 담임이 되면 질색하는 학부모들이 많아지게 됐다. 가르치라는 공부보다 가르치지 말라는 이념에 집착하다 보니 하루가 급한 학부모로서는 좌불안석인 것이다.

시국선언만 해도 그렇다. 이명박 정부가 정치를 잘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노무현 정부도 정치를 잘했던 정부는 아니었다. 그때는 안 하다가 이번에 시국선언을 한 것은 이념과잉 때문일 터이다. 좌파성향인 전교조가 우파정부가 잘못하고 있다고 집단적으로 지적하고 나서기 전에 왜 교단에서 자신들이 학부모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는지 반성부터 할 일이다.

노동현장은 어떤가. 한국통신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하면서 지나친 이념적 성향과 과잉정치화를 문제 삼았다. 생각해보면 노동운동은 이념투쟁의 장이 아니라 노동자의 복지가 최고의 관심사가 되어야 할 곳이다. 그럼에도 과도한 정치투쟁과 이념투쟁에 대한 불만으로 민노총을 떠나는 노조들이 속출하고 있다면 노동현장도 이념의 청정지역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행동으로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념무용론을 외칠 필요는 없다. 이념이 중요한 것은 권력과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고, 정치가 친소관계에 의한 패거리 범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해주기 때문이다. 원칙과 가치지향의 품위 있는 정치가 되기 위해서도 이념은 필요하다.

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념을 따지는 것은 무분별한 소금 치기와 다를 바 없다. 사회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탈이념이 아니라 이념의 오·남용을 막는 절제된 행위다. 그린벨트가 환경보호에 큰 역할을 한 것처럼, 이념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특유의 그린벨트 설정이 필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