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컬럼

그들은 돼지를 잡지 않았다

이정웅 2009. 8. 31. 21:20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끝내 ‘돼지를 잡지 않았다’.

야당 대표가 웬 돼지를 잡느냐는 의아함을 풀기 위해 증자(曾子:공자의 제자)의 일화를 돌아보자. 증자의 아내가 시장에 가려는데 어린아이가 따라가겠다고 울며 매달렸다. 아내는 아이를 떼놓으려는 심산으로 ‘집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시장 갔다 오면 돼지를 잡아 맛있는 고깃국을 끓여주마’라고 구슬린 뒤 장으로 갔다. 저녁 나절 장에서 돌아온 아내는 깜짝 놀랐다. 증자가 뒷간에서 돼지 잡을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여보, 왜 돼지를 잡으려 하나요?”

“당신이 아이에게 돼지 잡아준다는 약속을 했잖소.”

“애 구슬리려고 해본 말일 뿐인데 애써 키운 돼지를 잡다니요!”

증자가 주저 없이 돼지 목을 따며 대답했다. “부모가 자기 편하려고 지킬 생각도 없는 거짓 약속을 하면 아이들은 거짓말하는 방법까지 배우는 법이오.”

국회의원직 집단 사퇴서를 내놓고 길바닥에 나섰던 그들(민주당)이 달포도 안 지나 다시 국회로 돌아오겠단다. 증자의 돼지 얘기가 안 나올 수 없다. 그들이 사퇴서 낼 때 ‘이번만은 양심과 소신대로 사퇴 약속을 지키겠구나’고 믿었던 바보는 물론 없다. 길거리에 쇼 무대를 꾸려봤자 관객은 썰렁할 것이고, 가을바람 불기 전에 변명거리 찾아내 되돌아오리란 것 또한, 짐작 못 한 바보도 없다. 약속대로 끝까지 돼지를 잡을 위인들이 아니었던 거다. 따라서 앞뒤가 뻔한 구태(舊態)정치의 잔재주는 시빗거리조차 못 되니 깨닫든 못 깨닫든, 증자의 돼지 얘기나 던져주고 넘어가자. 그보다는 등원 선언을 한 바로 이튿날, 그들이 맨 먼저 벌인 정치 같잖은 정치가 더 못나보인다.

등원 선언 하루 만에 그들이 벌인 일은 중앙당사(中央黨舍)에 노무현`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초상(肖像)을 나란히 거는 ‘사진 걸기 행사’였다. 과거에도 전국의 관공서, 당사 등에 대통령 사진과 국정 지표 등을 게시했던 시절은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 때부터 사진 걸기가 권위주의의 잔재라며 재임 중 자신의 사진을 못 걸게 했었다. 괴팍해 보인 그도 그런 매력 있는 고집은 있었던 셈이다. 민주당 사람들은 그런 고인의 고집을 무시하면서까지 두 사람의 사진을 함께 걸고는 명분과 목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과거 차별화란 이름으로 기회주의적 정치를 한 적이 있다. 사진을 거는 것은 그런 과거에 대한 반성과 청산을 의미한다’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배신도 변절도 기회주의 정치도 않을 것을 다짐한다고 했다.

그러나 집단 사퇴서 결의가 쇼처럼 끝난 직후에 벌인 이번 사진 걸기 행사는 피눈물 나는 결의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정치 이벤트란 느낌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그 이유는 주군(主君)의 세(勢)에 따라 사진도 계산적으로 뗐다 걸었다 했던 절의(節義) 없는 전과가 있어서다. 그들(민주당)은 2003년 노무현의 열린우리당과 분당했을 때, 노 전 대통령의 사진들은 스냅사진조차 모조리 떼냈고 작년 대선 이후엔 두 전직 대통령의 사진을 걸려다 노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가 조여 오며 밀리자 보류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다 이제 양쪽의 지지勢를 모아야 할 다급한 상황이 닥치니까 밉다고 뜯어냈던 망자(亡者)의 사진까지 내걸었다. DJ 사진 또한 언젠가 비자금 소문이 우연스레 혹은 기획수사로 캐지기라도 한다면 재빨리 되떼내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기회주의 정치의 단절과 청산이 아닌 또 하나의 기회주의다. 정세균 대표는 사진을 걸며 ‘두 분이 당사에 돌아와 지켜주시니 든든하다’고 했다. 떨어진 국민의 지지가 저 세상 가신 분들, 그것도 한때 그들에게 손해된다 싶을 때는 멀리했던 사람들의 사진 두 장으로 지켜지리라 믿는 모양이다. 그들은 아직 못 깨닫고 있다. 초상 사진 백 장보다 한 마리의 돼지라도 약속대로 잡는 것이 감춰진 민심을 얻는다는 것을…. 힐난이 아니라 좀 정직하고 품격 있는 정치를 해보란 뜻이다.

金 廷 吉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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