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암컬럼

이재오와 600명의 암행어사

이정웅 2009. 10. 5. 20:32

 이재오와 600명의 암행어사
 
 
 
모두가 박문수 같은 어사(御史)가 된 기분으로 일하고 위원장이 이재오라는 사실을 마패로 생각해 달라.’

자타칭 대통령 실세라는 이재오 씨가 국민권익위원장에 취임하며 밝힌 첫마디다. 21세기에 어사에다 마패까지 들먹인 튀는 의욕, 좋다 치자. 그렇다면 어사는 무어며 마패는 무엇인가. 어사란 왕으로부터 특별 임무를 받아 지방관서를 돌며 민정을 살피고 잘못을 바로잡는 임시관직이다. 지시된 직무 내용에 따라 민생고를 탐문하는 문민질고(問民疾苦)어사, 농사에 관한 균전(均田)어사 등 9가지쯤 된다고 한다. 이 위원장이 ‘박문수 같은 어사’가 되라고 주문한 것은 아마도 이몽룡 형(型) ‘암행어사’를 염두에 두고 한 말로 들린다. 실제 취임사에서도 춘향전을 거론하며 자신의 지향점을 예시했다. 좋게 보면 권익위의 600여 명 부하들을 암행어사로 만들어 깨끗한 이명박 정부의 표상을 세워보겠다는 결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생뚱맞게 암행어사에다 마패까지 들먹인 건 왠지 권위주의적 왕조(王朝) 냄새가 난다. 잘해보자는 독려를 상징적으로 강조했을 뿐이라고 할지 모르나 어사니 마패 발언은 암행어사 제도의 정신을 놓고 보면 그가 자신의 위치와 임무의 한계가 어디쯤 매김돼야 적절한지를 모르고 한 발언 같다.

한마디로 ‘오버’했다. 암행어사는 노련한 정치인이 아니라 아직 관료의 때가 덜 묻고 정의감이 살아 있는 5, 6품 하급관리 중에서 주로 뽑아 보냈다. 정실(情實)이나 당파(黨派)에 엮일 기회가 없는 세대라는 장점도 있다. 그들의 주군도 노신(老臣) 어사대장이 아니라 추생(제비뽑기)으로 임명해준 왕임에도 "이재오가 위원장이라는 ‘사실’을 마패로 생각하라”고 강조한 것은 자신의 정치 파워와 실세 권위를 곧 마패로 알라는 뜻으로 곡해된다. 마패를 내주는 대통령은 뒷줄에 서야 된다는 얘긴가? 참 민망한 자기과시다. 마패는 공직자가 지방 임무 수행을 나갈 때 필요한 역마(驛馬)를 이용할 수 있는 징표다. 관직의 높고 낮음과 임무 내용에 따라 1마리에서 5~10마리까지 마리 수가 각각 다른 마패를 주었다.(암행어사는 두 마리) 마패의 권위는 곧 통치권자의 권위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이 위원장이란 사실’ 자체를 마패로 여기라고 한 말은 마패 정신은 물론 왕까지 우습게 안 위험한 호기(豪氣)다.

‘국회나 정부 부처에서 해결 못 해내는 부패 척결, 고충도 우리(권익위)에게 가져오면 100% 해결되더라는 소리를 듣자’고도 했다. 의욕은 높이 살 만하다. 그러나 600명의 암행어사를 출두시키면 100% 해결할 수 있는데 수십만 명의 정부부처, 사정`정보기관, 민원부서 공직자들은 풀어낼 수 없는 부패와 고충 민원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고충이고 부패인가. 자칫 국정원, 검찰, 국세청, 경찰, 부처 장차관 등 국가 공조직은 무능하고, 믿을 곳이 못 되는 이상한 나라라는 반어(反語)가 될 수 있다. 그런 정도 수준의 국가라면 암행어사가 6천 명이라도 별수 없는 나라다.

실제 나라가 기울던 고종 때 무용(無用) 암행어사 제도는 폐지됐다. 조선조 후기 들어 암행어사조차 자기당파는 덮어주고 반대당파는 털어내는 역비리가 생겨나기 시작해서다. 당파들은 서로의 비행(非行)을 감추려고 심복을 시켜 암행어사의 뒤를 밞아 약점을 캐, 탄핵하거나 암살하기도 했다. 속설에는 암행어사의 생존 귀환율이 30% 남짓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게 정치판이고 세상사다. 왕조도 없애버린 어사 얘기를 다시 꺼내고, 왕의 측근, 그것도 정치인을 내세우면, 권익위의 올바른 성과조차 표적수사`야당탄압`좌파숙청이라 시비 거는 빌미가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처음부터 요란하게 ‘암행어사 600명 출두야!’를 너무 미리 외쳤기 때문에 반작용을 우려한다는 뜻이다.

남대문, 동대문 바깥을 나서기 전까지는 왕의 비밀 임무가 적힌 봉서(封書)를 뜯어보지 못하게 했던 어사 제도에서 ‘소리 없는 소명(召命)의식’과 겸손을 배웠더라면 마패 이야기 따위는 나오지도 않았으리라. 잘 풀려 나가는 MB 정부 주변에 부족한 2%는 바로 겸허함이다. 조용한 충성, 말 없는 애국을 당부한다.

金 廷 吉 명예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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