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박정희 대통령과 도산서원 금송(金松)

이정웅 2009. 9. 28. 07:29

 

 담장 밖에서 바라 본 금송 

 기념식수 표석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 강당

                                                                                     박 전대통령

도산서원 경내에 있는 금송을 두고 말이 많다. 논쟁에 불을 지핀 분은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 스님이었다. 스님은 시론(매일신문 2013, 8, 8)에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문제를 제기했다.

 

“학창 시절 도산서원에 간 적이 있다. 거기서 조선시대 올곧은 선비정신에 대해서 들었다. 그리고 천 원짜리 지폐의 뒷면에 그려졌던 나무 ‘금송’을 기억한다. 표지석에는 ‘이 나무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어 아끼시던 금송으로서 도산서원의 경내를 더욱 빛내기 위해 1970년 12월 8일 손수 옮겨 심으신 것입니다’ 라고 새겨져 있다. 거기서 나는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2011년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도산서원 관련 파일을 읽다가 가짜가 아닌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결국 문화재청과 안동시에 사실조회를 했고, 두 기관에서 ‘현 금송은 1973년 4월 22일 새로 구입한 것을 원위치에 재식수한 것’이라고 답변을 들었다.

국기기록보존소에 의하면,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기념식수한 금송은 1972년 고사했고, 현 금송은 1973년 새로 심은 나무로 판명되었다. 대통령 기념식수가 관리소홀로 고사하자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해 몰래 새 금송을 심은 뒤 지금까지도 사실을 은폐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금송은 일본 특산종이란 이유로 여러 차례 구설에 올랐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관저를 건립할 때,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송은 일본을 대표하고 일본 왕실과 사무라이 정신을 상징하는 나무라는 점에서 화폐 도안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지나치게 성장해 서원의 경관을 가리는 문제가 드러나자 안동시가 2003년 이전하기 위해 문화재청에 신청했으나 ‘대통령 기념식수’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2011년 12월, 문화재청은 새로운 표지석을 설치했다. 바뀐 표지석에는 ‘이곳은 1970년 12월 8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의 준공을 기념하기 위해 청와대의 금송을 옮겨 심었던 곳이나 1972년 고사(枯死)됨에 따라 1973년 4월 동 위치에 같은 수종(樹種)으로 다시 식재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표지석 철거로 사건의 끝은 아니었다. 만약 금송이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나무가 아니라면, 일본 특산종 나무가 왜 거기 있어야 하는 걸까? 이 질문에 대해 문화재청은 안동시와 협의해야 한다고 하고, 안동시는 도산서원과 상의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원의 결정을 묻는 방법을 택했다. 논점은 2003년 안동시가 제출한 금송의 이전승인신청에 대해 문화재청이 ‘대통령 기념식수’란 이유로 이전 금지시킨 것은 부당한 행정행위란 취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나무가 무슨 죄냐고? 그러나 이건 나무이야기가 아니라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공자는 말한다. 군자(君子)의 길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 것(無自欺)이라고. 대학(大學)에 나오는 이 구절을 퇴계 선생은 평생 가슴속에 새기고 살았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벽에 써놓고 실천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도산서원의 금송은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것이 아니라 안동군수가 심은 가짜임이 밝혀진 지금, 도산서원의 금송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이제 그들이 답할 차례다.”

 

혜문 대표는 스님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우리 문화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일을 해오고 있는 훌륭한 분이다.

시론의 요지 즉 현재의 나무는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심은 것이 아니고 금송은 일본고유종이 맞다.

그러나 오래 동안 많은 기념식수를 담당해온 사람으로서 이글을 읽으며 느끼는 감정은 스님의 견해 좀 다르다. 나무는 아무리 정성스럽게 심어도 캘 때 뿌리를 다치거나, 심은 후 물을 제때에 주지 않거나, 갑작스럽게 병이나 충해가 발생하여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같은 생명체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대신할 나무는 없다.

그렇다고 비워 두기도 어렵다. 그래서 선택되는 방법이 같은 종류의 나무를 대신 심는 경우다.

가장 최근의 사례 역시 안동에서 일어난 일인데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하회마을 양진당을 방문하여 구상나무를 기념 식수했다. 그런데 이 나무 역시 아쉽게 고사했다. 이후 처음 심을 때보다 더 작은 것을 심은 것이 현존하는 나무다.

먼 사례는 호남의 명소 소쇄원에서 찾을 수 있다. 소쇄원은 우리나라 제일의 민간 정원이다. 조선 중기 올곧은 선비 검암 조광조가 사약을 받고 죽자 선생의 제자 양사원이 은둔생활을 하기 위해 조성한 원림이다.

그는 정자 들머리에 봉황을 기다린다는 뜻의 대봉대(待鳳臺)를 축조하여 초정(草亭)을 짓고 그 앞에 벽오동나무를 심었다.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봉황은 벽오동나무 숲에 둥지를 틀고 대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는 전설의 새다. 그런데 이 벽오동나무가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죽자 후손들이 그 때 마다 대를 이어 새로 벽오동나무를 심고 있다.

이런 아름다운 전통의 나무 심는 문화를 보면서 특별히 금송이 비판받는 이유가 혹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폄하 하기위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닌지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이 후 보도에 의하면 서원 밖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한다. 아쉽다.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 그가 성인이든, 평범한 시민이든 누구에게나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 자체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평가하는 사람의 잣대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가장 극명한 분이 박정희(朴正熙,1917~1979) 대통령이 아닌가 한다.

중국의 속담에 ‘과(過)3 공(功)7’이라 하여 잘 못된 것이 3이고 잘 한 것이 7가지라면 훌륭한 사람이라고 한다는데 우리나라는 이와 달리 부르는 사람이 있어 아쉽다.

‘독재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백성들이 사는 이 나라를 세계 10대 무역국으로 성장시켜 가난을 몰아낸 ‘영웅’으로 불리는 사람들로 대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그를 후자로 부른다.

전국에 있는 옛 사람이 심은 나무를 찾아다니는 나는 몇 곳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심은 나무를 보고 그분의 또 다른 모습에 감탄했다. 전라도 구례의 천년고찰 화엄사의 잣나무, 강원도 강릉 율곡을 기리는 오죽헌과 경북 구미 금오산의 야은의 혼이 깃든 채미정, 충주의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충렬사의 주목(朱木), 경남 남해 이순신정군 사당 충렬사의 히말라야시다 등이었다. 이 나무들은 허물어져 방치되어 풀만 무성하던 오죽헌이나 충렬사, 도산서원 등을 크게 고쳐 새로 단장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손수 심은 기념식수(紀念植樹)다.

이런 면면을 볼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 땅에 가난만 몰아내려한 것이 아니라, 선현들의 유적지를 성역화 하여 정신적으로도 부유한 나라를 만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돌아가셨을 때 입은 옷도 낡았을 뿐 아니라, 그 흔한 비자금도 얼마 되지 아니하였다 하니 위장전입 등 탈법으로 치부하고 거기에 더해 고위공직을 맡겠다는 사람들을 비롯해 모든 공직자들이 본받아야 할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