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성산인 이언부선생과 망배현 반송(盤松)

이정웅 2009. 8. 8. 07:24

성산인 이언부선생과 망배현 반송(盤松)

 

 성산인 이언부 선생이 임란을 피해 은거하며 심었다는 수령 400여 년의 반송

 

 

대구, 경북지역에 산재한 명목(名木)을 찾아 그 곳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 책을 만들기 위해 봄부터 여름까지 정신없이 쏘다녀, 언제 봄이 왔는지 여름이 더웠는지도 모르게 보냈다. 계약 상 연말까지 출판하면 되지만 이 일을 놔두고 다른 일을 할 수 없고, 또한 지원되는 출판비용으로는 분량을 더 늘리기도 어렵기 때문에 서둘러 마감하고 좀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내고 싶어 정리한 원고를 출판사에 막 넘기려든 참이었다. 그런데 종보(宗報) 받아보고 깜작 놀랐다.

조선 중기 사재감(司宰監)(궁중에 쓰이는 생선, 고기, 소금, 땔나무 등의 조달을 담당했던 관청)첨정(僉正,종4품)을 지낸 성산인 둔암(遯庵) 이언부(李彦富, 1539~1596)공께서 임란으로 전국이 초토화되던 1594년(선조 27) 가야산의 한 지맥인 낭금산(囊金山)에 우거하며 가지가 18개 달린 18지송(十八枝松)을 심고, 선조 임금의 강녕을 기원하며 4배를 드리던 고개로 망배현(望拜峴)이라 했으며, 이제는 수령 400여 년이 된 소나무의 실물 사진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구, 경북의 명목을 찾아다니며 다른 문중 어른들이 심어 놓은 이끼가 낀 큰 수식목을 보면서 우리 선대들은 왜 이런 명목을 남기지 아니하였을까 하고 아쉬워했던 차였기에 더 반가웠다.

종보발행소에 전화를 걸어 석대 종인(宗人)으로부터 제보자 확인을 부탁했더니 공교롭게도 오래 동안 대구광역시 교육청에서 교육행정을 담당하다가 중앙도서관장을 마지막으로 퇴임한 영한(永漢) 종인(宗人)이라고 했다. 그에게 나무의 소재지와 현장을 물었더니, 성주군 가천면 화죽리 포천계곡 초입에 있는 성산 이씨 김산공후 집성촌인 성주 죽곡(속명 대실)에 살며 성주 향교 장의를 지내신 분으로 유심이 깊은 그의 종숙 달호 종인에게 도움을 청하면 현장 안내가 될 것이라며 알려주었다.

 

 

 

1.5미터 정도에서 줄기가 뻗은 18지송의 줄기

 

 

휴일을 맞아 아내와 며느리, 딸아이 은정이를 데리고 성주로 향했다. 우선 벽진에 있는 봉학산장을 들였다. 그 곳에는 교동시장에서 전기(電氣)관련 사업으로 성공했으나, 복잡한 도시가 싫어 깊은 산골짜기인 그곳에 터를 잡고 수천 평의 연 밭을 만들어 사서 고생하고 있는 김무희 선생의 초청에 응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번 찾았을 때와 달리 종류도 늘어났고, 새로 개발한 차며, 막걸리도 있어 수익이 다소 생긴다고는 하나 고생은 여전한 것 같다. 특히 최근 며칠 사이의 냉해로 연꽃의 개화가 늦는 등 애로가 있다고 했으나 그래도 하는 일이 즐겁다고 했다. 농장을 한 바퀴 돌아보고 그가 개발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가천으로 향했다.

성주군청 홈페이지를 통해 위치를 이미 알아놓았기 때문에 쉽게 음죽마을를 찾을 수 있었다. 마을의 풍광이 배산임수형으로 들이 넓고 계곡이 있어 청량한 기분이 들었다.

마을 초입에 고풍스러운 건물(사의당,四宜堂 임은 나중에 알았다)이 있고 몇 분이 모여 놀고 있어 혹시나 하고 들였더니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달호 종인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영한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날따라 외지에 나가 있던 그 마을 출신 젊은이들이 삼복을 맞아 마을 일가(一家)어른들께 여름철 보양식을 대접하고 있어 자리를 함께했다.

 

 

 

후손 종언, 종인이 1869년(고종 6)에 복원한 경모재

 

찾아온 취지를 설명했더니 더욱 기뻐하며 곧 현장을 안내해 주었다. 오랜 세월 수백 번도 더 닥쳤을 태풍 등의 피해로 여덟 개의 가지는 부러지고 10개만 남아 생긴 대로라면 십지송(十枝松)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그러나 1.5미터 정도에서 열 개의 가지가 돋아난 반송(盤松)이자, 수피가 붉은 명품(名品) 소나무였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쉬웠다. 다시 입향조 둔암공이 우거하든 곳에 세워진 경모재(敬慕齋)로 발길을 옮겼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아주 정갈하게 꾸며져 있었으며 특히 산속이라 주변이 온통 숲인데도 그래도 산수(山水)가 부족하다고 여겼던지 일부러 조성해 놓은 연못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산중턱에 있는데도 마르지 않고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망가지지 아니하고 보존된 점도 신기했다.

조선 후기 노론들의 횡포 속에서 어렵게 공조판서에 올라 남인의 자존심을 지켰던 원조(源祚) 선조의 기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사재감 첨정 언부(彦富)는 안동 일직에 살다가 임진왜란을 맞아 처자식을 이끌고 성주 가야산 북록 구수동(九水洞)에 다다랐다. 그가 이곳에 정착한 것은 선조들이 살았던 성주를 잊지 못해서이다. 띠를 엮어 집을 짓고 살다가 3년을 지나 건너편 낭금산으로 옮기니 역시 서쪽을 바라보는 곳이다. 낮에는 화전(火田)을 일구고, 밤에는 인근의 심덕립(沈德立), 범림사 중 운백(雲白)과 더불어 세상을 잊고 살다가 병신년에 돌아가시니 그 터에 장사를 지냈다. 묘소 곁에 관리하는 집을 짓고, 위토를 마련하고, 주변의 산림의 벌채를 금지하며 잘 가꾸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퇴락하여 기사년에 후손 종언(宗彦), 종인(宗仁)이 서로도와 집을 고쳐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추원보본하는 뜻이 참으로 가상하다. 나에게 기문을 청하며 이 일이 후손들에게 전해 질 것을 바랐다.

기사년 봄 종후인 원조 삼가 쓰다.

 

달호 종인이 번역한 것을 필자가 요점만 의역한 것이다. 이 기문을 통해 경모재는 둔암공의 후손 종언, 종인에 의해 1869년(고종 6) 봄 즉 140년 전에 복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경상대학교 이필상교수의 <남명학파관련 인명록>에 등재된 것으로 보아 남명의 제자이며 유고를 3권이나 남겼다고 하나 임란 중 분실되었다고 한다.이번 일을 통해 가장 기뻤던 것은 우리 문중에도 나무를 지극히 사랑하는 선조가 있어 그 흔적을 찾아보고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이다. 달호 종인과 다른 종인들의 따뜻한 배려로 용무를 잘 보고 원조 선조께서 낙향해 은거했던 아름다운 정자 만귀정을 찾아 선산 김문인 아내와 이제 갓 시집 온 한산 이문의 며느리에게 자랑삼아(?) 보여 주려고 포천계곡으로 향했으나 피서객들이 무질서 하게 길옆에 세워둔 차로 통행이 어려워 발길을 돌려 뒷날로 미루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