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정부인 안동 장씨와 낙기대 굴참나무

이정웅 2009. 7. 7. 19:59

 

 정부인 안동 장씨가 굶주린 이웃들에게 도토리 죽을 쑤어 주기 위해 심었다는 굴참나무

 남편 석계 이시명과 함께 살았던 두들마을 석계고택

정부인 안동장씨 상

 

 

2009년 신년 벽두 조선일보에 연재 중인 조용헌씨의 칼럼 ‘재령 이씨 도토리 죽’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다. 나무의 용도가 땔감에서부터 건축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굶주린 사람을 살리는데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것을 새로 알았기 때문이다. 칼럼에 의하면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소재 재령이씨 운악종가(雲嶽宗家)에서는 한 때 마당 6,000석의 영남 5위의 부자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경제가 망가진 데다 흉년이 자주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하인들에게 도토리를 주워 오게 하여 1년에 200여 가마를 확보, 소문을 듣고 찾아 온 배고픈 사람들 300여 명이 하루 먹을 도토리 죽을 안주인 진성이씨와 셋째 며느리 정부인 장씨가 쑤어 주었다고 한다. 어떤 날은 700여 명이 찾아와서 고부(姑婦) 모두 손톱에서 피가 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많이 가졌으면서도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재령이문의 높은 도덕성과 참나무의 또 다른 가치도 이해하게 되었다.

정부인 장씨는 남편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80~1675)과 함께 영덕에서 이곳 영양의 두들마을로 분가해 터를 잡자마자 참나무부터 먼저 심었다고 한다.

재령이씨가 명문의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며느리인 정부인(貞夫人) 장씨(張氏)의 역할도 컸다. 최근 오만 원 권 지폐(紙幣)에 율곡 이이의 어머니인 사임당 신 씨가 들어가게 되었지만 자녀교육이나 예술적 소양 등 어느 것 하나 누가 우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정부인 장씨와 사임당 신씨는 한국 여성을 대표하는 분들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사임당은 ‘초충도(草蟲圖)’라는 그림을 통해 화가로서 명성을 크게 얻은 반면, 정부인 장씨는 ‘음식디미방’의 저술을 통해 한국 전통음식의 조리법 대가로 자리매김 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인 장 씨(1598~1680)의 일대기는 한 편의 드라마 같다. 학봉 김성일의 수제자인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의 딸이자, 퇴계학파의 대들보인 존재 이휘일(李徽逸)과 갈암 이현일(李玄逸) 형제의 어머니다. 당시 조선의 여느 며느리들과 같이 시부모를 봉양하랴, 자식들을 돌보랴, 남편을 뒷바라지 하랴, 친정집을 보살피랴, 잠시도 편할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평상심을 잃지 아니하고 자식들을 훌륭한 인물로 키웠으며 본인 역시 명저(名著)를 남겼다.

저서 <음식디미방>은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한글 요리서 중 가장 오래 된 책이자 한글로 쓴 최초의 요리서다. 특히 조선 중기 사대부가의 요리 146종을 정리, 무려 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재현이 가능할 수 있을 만큼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뿐 아니라, 어법과 철자 등은 국문학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이 이외에도 시 9편 서간문 1편을 남겨 문학가로서의 자질도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소녀시절 창밖에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썼다는 작품 ‘소소음(簫簫吟)은 다음과 같다.

창밖에 소록소록 비 내리는 소리 /소록소록 그 소리 자연의 소리러라.

내 지금 자연의 소리 듣고 있으니 / 내 마음도 또한 자연으로 가는 구나.

자녀들에게는 늘 ‘너희들이 비록 글 잘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해도 나는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착한 일 하나라도 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아주 즐거워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여 학문을 하되 마음부터 먼저 닦을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이러한 어머니의 자애로운 당부를 잊지 아니한 자녀들이 모두 훌륭하게 자라 성리학자로서 이조판서를 지낸 목민관으로서 사회에 공헌했다.

두들마을을 찾은 우리 일행은 정부인 장씨가 심었다는 참나무를 빨리 보고 싶었다. 또한 나무가 현존하는지도 궁금했다. 왜냐하면 이정도의 미담과 역사성을 가진 나무라면 천연기념물이거나, 하다못해 경상북도 기념물로는 지정되었을 터인데 검색해 보아도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두들마을은 이번이 처음 아니었다. 그 때는 도토리이야기를 못 들었기 때문에 석계와 정부인 장씨가 거처하던 집과 정부인기념관, 소설가 이문열의 문학관을 보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마을에 도착하니 또 다시 비가 내렸다. 안내를 받으려고 했으나 해설사가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무작정 나무를 찾아 돌아다녔는데 마을 앞 정부인 장씨의 기념비가 서 있는 언덕에 큰 나무들이 무성해 가 보았더니 ‘굴참나무’였다. 흔히 참나무라고 하지만 식물도감에 참나무는 없다. 상수리, 갈참, 졸참, 신갈, 떡갈, 등 종류가 다양하다. 사람들은 이를 뭉뚱그려 참나무라고 한다. 굴참나무는 참나무의 일종으로 도토리가 잘 열리는 나무이나 껍질은 주로 포도주 등의 병마개로 쓰는 나무다. 일대를 낙기대(樂飢臺)라 했다고 한다. 비록 배는 굶주리지만 정부인 장씨의 아름다운 선행을 보면 즐겁다는 뜻이 아닐까. 해방 전까지도 도토리 죽 먹기가 시행되었다는 안내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