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갈산 권종락선생과 운곡서원 압각수

이정웅 2009. 7. 28. 21:37

 

 갈산 권종락선생이 죽림공 권산해의 복권을 기념해 순흥객사 옆의 은행나무 가지를 꺾어와 심었다는 압각수 즉 은행나무

 안동 권씨 시조 권행과 죽림공 권산해, 귀봉 권덕린을 기리는 운곡서원

 죽림공 권산해의 복권을 위해 노력했던 갈산 권종락 처사의 기적비

 

신라 천년의 고도인 경주는 국내법에 의해 보호되는 많은 문화재가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석굴암, 불국사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국제법으로 보호되는 문화재도 많은 도시다. 따라서 지방문화재 따위에는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등급여부와 관계없이 나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가보아야 할 곳이 강동면 왕신리에 있는 운곡서원(雲谷書院)이다. 경주에는 김알지가 탄생설화가 있는 계림(鷄林)이나, 독특한 조경기법을 사용한 안압지 등 나무나 조경에 대해 이름 난 곳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200여 년 전 아직 농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 꺾꽂이방법으로 그것도 삽수(揷樹)를 채집해 1개월여 동안 방치(?)했다가 살려 낸 기적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은행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은행(銀杏)나무는 외관상으로 보기에는 잎이 넓으나, 침엽수로 분류되며, 오리발을 닮아 압각수(鴨脚樹)라고도 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갈산(葛山) 권종락(權宗洛)선생이다. 그러나 압각수가 하늘을 찌를 듯 서있는 운곡서원에 관한 이야기부터 먼저 해 볼까 한다.

이 서원은 경주시 강동면 경치 좋은 곳 왕신리에 있다. 1784년(정조 8)에 건립되어 추원사(追遠祠)라 하였으며 안동 권씨의 시조 고려 태사 권행(權幸)과 조선 전기의 문신 죽림 권산해(權山海), 동방오현의 한분이 회재 이언적선생의 수제자 귀봉 권덕린(權德麟)을 배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서원도 대원군의 서원을 철폐령의 회오리바람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 후 1903년(고종 40) 다시 설단을 하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976년 지역 유림의 공론으로 중건하면서 이름을 운곡서원(雲谷書院)으로 바꾼 곳이다.

태사공 권행(權幸, ?~?)은 안동 권씨 시조로 본래 신라의 경주 김 씨였다. 930년(고려 태조 13)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사이에 있었던 고창(지금의 안동)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태조는 김행(金幸)의 전공을 높이 치하하며 ‘정세를 밝게 판단하고 권도를 잘 취하였다. 즉 능병기달권.(能炳幾達權)’이라 하며 권씨 성을 하사하고 태사(太師)의 작위를 제수했다. 그 후 태사공으로 불리며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어 안동을 식읍으로 받아 그 자손들이 세습했다. 이후 안동 권씨는 부와 명예(名譽)을 함께하며 명문으로 자리 잡게 한 분이다.

죽림 권산해(1403~1456)선생 역시 태사공의 후손으로 1403년(태종 3) 예천군 용궁면 대죽리에서 태어났다. 단종의 이모부다. 어려서부터 성격이 강직하고 지조가 매우 곧았다고 한다. 증조부 좌의정 진(軫)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는데 하루는 백이전(伯夷傳)을 읽다가 책을 덮고 ‘이런 사람이 있어 만고강산을 부지할 수 있다.’며 탄식해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세종 때 재행(才行)으로 녹사, 주부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단종이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을 제수하니 선왕(세종, 문종)의 은덕을 어린 단종에게는 갚아야겠다며 출사했다.

그 후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니 울분을 못 이겨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세조가 등청할 것을 수차례 종용했으나,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등이 단종 복위운동을 전개하다가 발각되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건에 가담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탄식하며 지붕위에 올라가 떨어져 순절한 분이다.

귀봉 권덕린(1529~1573)은 경주 안강 두류리에서 출생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 자랐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는 그가 혹시라도 공부를 게을리 할까 걱정하며 아주 적극적으로 배움의 길로 인도했다. 회재 이언적선생의 문하생이 되었다. 선생이 그의 자질에 탄복하여 ‘남을 경발(警發)함이 많고 그와 더불어 학문을 논하면 매우 얻을 바가 있다.’ 했다고 한다.

1553년(명종 8)문과에 급제해 성균관 전적, 병조·예조좌랑, 회덕, 하동현감을 지냈다. 스승 이언적선생이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를 받아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돌아가시자 중도에서 영구(靈柩)를 맞이해 돌아왔다. 1670년(현종 11) 노모를 돌보기 위해 고향 가까운 영천군수를 자원했으나 여의치 않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했다. 이듬해 고을 사람들과 논의해 옥산서원을 창건했다. 1572년(선조 5)합천군수로 나아가 세금을 균등하게 부과하고 학문을 장려하여 고을을 크게 순화시키니 주민들이 그를 기리는 유애비(遺愛碑)를 세웠다.

회재 선생은 문묘(文廟)에 모셔질 만큼 훌륭한 분이나 40대 초반 약 6년간 옥산에 머문 것을 제외하면 외지에서 벼슬살이를 했기 때문에 남들처럼 제자를 많이 기를 수 없었다. 김자, 안경창, 이전인, 김세양, 등이 그의 문하생이나 박세채가 지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의하면 귀봉 한 사람 뿐이라고 했다. 시문이 뛰어났으며 저서로 <구봉집>있다.

은행나무가 행단이라고 하여 향교나 서원에 많이 심는 나무이기는 하나 운곡서원에 압각수가 심어진 데에는 조선(祖先)에 헌신적인 한 후손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

그가 바로 갈산 권종락(1745~1819)선생이다. 그는 성삼문 등은 숙종 대에 복관되었으나, 선대 죽림공의 억울한 죽음은 그 이후에도 신원(伸寃)되지 않는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유림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등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1789년(정조 13)마침내 복권을 받아 이조참판에 증직되게 했다.

그는 복작 교지(敎旨)를 받고 순흥 객사의 압각수가 단종사화를 미리알고 죽었다가 그 분들이 복관될 때 다시 살아난 이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지를 꺾어 예천의 묘소를 거쳐 한 달 만에 운곡에 도착하니 가지가 말라 도저히 살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 죽림공의 충절이 만약 이 나무에 드러난다면 반드시 살 것이다.’며 심고 정성스럽게 가꾸었더니 살아났음은 물론 1885년(고종 21)에는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충민(忠愍)이라는 시호도 받았다.

세상에 불가사의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듯이 이 역시 이적(異蹟)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갈산공이 이 나무를 심은 해가 1789년이니 현재 수령은 220년이 되어야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시의 보호수 표석에는 330년으로 되어 있어 110년의 차이가 난다. 나무가 커서 그런 착오를 일으킨 것 같으나 토질이 비옥하면 나무가 빨리 자랄 수도 있으니 갈산 선생의 정성으로 되살아난 나무로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