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정선 봉양리의 전국 최대 최고령 뽕나무

이정웅 2009. 8. 30. 17:50

 

 조선초 고순창님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정선읍 봉양리의 뽕나무 수령이나 수고 등 전국 최대이다

 뽕나무 줄기

 조선시대에 건축된 고순창의 후손 고학규 가옥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89호) 뽕나무는 원래 이집 담장 안에 있었다고 한다. 

 

정선 봉양리 전국 최대, 최고령 뽕나무

 

 

강원도 정선은 두 가지 이유로 꼭 가보고 싶었던 고장이다. 첫째는 30여 년 전 내무부(, 행정안전부) 연수원에서 장기교육을 받을 때 강원도 대표들이 들려준 처절하리만큼 비장한 정선아리랑의 발상지가 어떤 곳일까 하는 점 때문이고 두 번째는 전국 최대이자 최고령의 뽕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구에서는 당일치기로는 불가능하여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행운이 찾아왔다. 제일강산강릉21실천협의회의 강남일 사무국장이 대구시의 가로수 조성사례를 발표해 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쾌히 승낙했다. 발표를 마치고 서둘러 정선행 버스를 탔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먼저 찾은 정선장도 파장이었다. 곤드레나물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이른 아침 시내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안개가 잔뜩 낀 정선은 선경 같았다. 뽕나무(강원도 기념물 제7)는 군청 바로 앞에 있었다. 어릴 때 누에 치는 것을 보고 자랐지만 줄기를 모두 잘라 키웠기 때문에 이렇게 큰 나무가 양잠의 고장으로 알려진 상주나 밀양을 제외하고 정선에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양잠을 위한 뽕나무는 삼한 시대에도 심었고, 신라의 박혁거세도 적극적으로 장려했으며 고려에서도 비단을 생산했고 조선조에도 권장했다.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의 <농가월령가> 4월 조에도 한 잠자고 일어난 누에 하루에도 열두 밥을 / 밤낮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먹이리라 / 뽕 따는 아이들아 나중에 딸 생각해서 / 묵은 가지 따 버리고 햇잎은 잘 골라 따소.”라고 했을 뿐 아니라, 왕실에서도 양잠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친잠례(親蠶禮)를 행했다.

1476(성종 7) 왕궁 후원에 채상단(採桑壇)을 설치하고 3월에 친잠례를 행했으며 이듬해에는 친잠응행절목(親蠶應行節目)을 제정하고 이어 1529(중종 24)에는 2월도 시행했다.

왕비는 세자빈과 내외명부(內外命婦)들을 거느리고 실시하였고, 1767(영조 43) 3월에 작성된 친잠의궤(親蠶儀軌)에 의하면 왕비는 다섯 개, 내외명부는 일곱 개, 2·3품의 부인들은 아홉 개 가지의 뽕잎을 땄다. 의식이 끝나면 만조백관이 왕비에 하례를 드렸다.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참고)” 정선에 뽕나무가 많았던 사실은 여말 문신 안축(安軸, 1282~1348)의 시 황폐한 옛 성터에 뽕나무와 삼()10리를 이었네송인(宋因)의 시에 뽕나무와 잣나무에 싸인 집들이 물가에 가까이 있다라는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문화재 설명에 따른 오류는 이곳의 안내문도 다를 바 없었다. “뽕나무는 추위에 견디는 힘이 강해 전국 어디에서나 자란다. 나무껍질은 회갈색 또는 회백색이고, 잎은 긴 타원형으로 가장자리에 둔한 톱니가 있다. 꽃은 6월에 피고 열매도 6월에 맺어 검은색으로 익는다.

뽕나무 잎은 누에치기에 있어서 필수적이라 국가에서는 일찍부터 뽕나무 재배를 권장하였다. 봉양리의 뽕나무는 나이가 5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5m, 둘레 2.5m로 전국에서도 크고 오래된 뽕나무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나무의 유래에 대하여는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제주고씨가 관직을 버리고 정선으로 내려오면서 옮겨다 심은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예부터 봉양리 일대를 가리켜 상마십리(桑麻十里)라 불렀던 점으로 미루어 길쌈이 성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뽕나무밭에 마을이 들어서고 한 그루의 뽕나무만 남아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현장에 설치해 놓은 안내판에는 수령이 600년이라고 하여 100년의 차이가 있고, 실제로는 2그루인데 1그루라고 했다.

안내문 중 제주고씨는 중시조 고말로(高末老)14세손으로 맨 처음 정선에 정착한 형 고순성(高順成)과 이어 들어온 아우 고순창(高順昌) 형제를 말하는 것 같다(정선 상유재고택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9호 안내문). 형 순성은 음사(蔭仕)로 벼슬길에 나아가 예빈록사직장(禮賓錄司直長)을 지냈으며 고려말 나라가 혼란하자 벼슬을 버리고 1378(우왕 4) 가족과 함께 정선으로 들어왔으며, 아우 순창은 일명 순철(順哲)로 조선 초기 문신이다. 1375(우왕 원년)에 태어나 태조 때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집의(執義)를 거쳐 호조 참판을 역임했다. 1455(세조 1)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 패륜에 분개하여 가족과 함께 형이 은거하고 있던 이곳으로 내려와 속세를 등진 채 청아한 생활을 하다가 1457(세조 3) 향년 83세로 돌아가신 분이다. 이들 형제가 지금의 뽕나무를 심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굳이 따진다면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된 해가 1971년이니 수령이 600년이라면 형 순성(順成), 500년이라면 아우 순창(順昌)이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뽕나무 바로 옆에는 선대가 살던 상유재고택(桑惟齋 古宅,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89)이 있다. 정선 일대에 가장 오래된 집으로 재액(齋額) 상유(桑惟)가 말하듯 뽕나무를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정원에 큰 회양목이 있는 것도 이채로웠다. 현재 순창의 20대 후손이 살며 여행객들에게 게스트하우스로 개방하고 있다. 국내 최고의 수령이자 크기가 최고인 만큼 천연기념물로 격을 높이는 것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