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지 담장 밖 화단에 있는 모감주나무 경상북도 기념물 제50호로 지정된 안동시 송천동의 모감주나무는 이 곳에 있던 2그루 중에서 가져간 1그루가 아닌가 한다.
서석지가 잘 바라보이는 곳에 지은 경정
석문선생 부인 전주 유씨가 친정 안동 무실에서 가져와 심은 은행나무
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에는 대구, 경북에서는 제일 먼저 문화재(경상북도 기념물 제50호)로 등록된 모감주나무가 있다. 꽃이 귀한 7월 초순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조경수로 많이 심어지고 있으나 중국, 우리나라, 일본에만 자생하는 세계적인 희귀종이다. 20cm~30cm 정도 약간 비스듬하게 뻗은 꽃대에서 노란 꽃을 피워 영명(英名)으로는 골든래인트리(Golden Rain Tree) 즉 ‘황금빛줄기나무’로 불린다.
이 나무가 주목받는 것은 충청도 안면도의 군락지(천연기념물 제138호)때문이다. 원산지가 중국인 이 나무가 서해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이유는 중국에서 자라던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가 서해를 떠다니다가 이곳에 닿아 싹을 틔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4년 바다가 접해있지 않는 내륙지방인 안동에서, 1990년에는 필자에 의해 역시 내륙인 대구에서 (대구시 기념물 제8호) 확인되어 종전의 해류를 통한 열매가 이동했다는 설은 근거가 희박하게 되었다. 1992년 포항에서 다시 대단위군락지가 발견되어 천연기념물(제371호)로 지정되었다. 기청산식물원의 이삼우 원장께서는 황금색의 아름다운 꽃, 가지 끝에 대롱대롱 열리는 삼각형의 씨 주머니, 가을의 노랗게 물든 단풍 등 어느 것 하나 나무랄 대 없는 나무라고 극찬한다. 그런데 자료를 검색하다가 뜻밖의 기록에 놀랐다. 송천동의 모감주나무는 원래부터 안동에서 자생했던 나무가 아니라, 영양군에 있는 자양산에서 옮겨 심었다는 것이다. 즉 1636년(인조 12)입암면으로 이주해 서석지(중요민속자료 제108호)를 만든 석문 정영방(鄭榮邦, 1577~1650)선생이 평소 좋아했던 나무인데 돌아가시자 1651년(효종 2) 아들이 안동으로 이식했다는 것이다.
자생지가 흔하지 않아 알려진 곳 대구, 포항은 모두 시 기념물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따라서 350여 년 전에 있었던 이 이식 작업이 사실과 부합하기 위해서는 영양에도 모감주나무가 자생해야 한다.
7월 초순 나무를 좋아하는 몇 사람과 함께 이러한 의문을 품은 채 영양으로 향했다. 그런데 반변천을 건너자마자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좌측 산 기슭에 상당한 개체수의 모감주나무가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옮겨 심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님을 확인하는 즐거움도 컸지만 이내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이 나무를 가져간 안동은 자생지가 아니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경상북도 기념물로 등록했는데 정작 나무의 본향인 영양군은 지금까지 왜 이런 조치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기고장의 자랑거리를 하나라도 더 찾아 주민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나아가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은 것을 썩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이어 서석지(瑞石池)에 도착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석지는 전라남도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세연정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민가(民家) 정원의 하나다.
입구의 큰 은행나무는 선생의 부인 전주 유씨가 친정인 안동 무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1636년(인조 14) 이곳으로 이주해 왔다고 하니 서석지 축조와 함께 심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왼쪽 화단에 큰 모감주나무 한 그루가 서 있어 평소 선생이 좋아했던 나무라 하여 심고 가꾸는 것이 아닌가 하니 조선(祖先)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아니하는 후손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또한 안동에 가져 가 심은 것은 여기게 있던 것 중 한 그루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서석지에는 연꽃이 피기 시작했다. 높이 존경받는 다는 상경석(尙坰石), 떨어진 별이라는 낙성석(落星石), 옥으로 만들었다는 옥계척(玉界尺) 등은 연잎에 가려 보이지 않고, 신선이 노닌다는 선유석(仙遊石), 웅크린 용의 형상을 한 와룡석(臥龍石) 등은 들어나 있다. 돌 하나마다 이름을 붙여 우주의 오묘한 철학을 담으려 했던 선생의 깊은 뜻을 알 리 없는 속인으로서는 하나의 물체에 불과할 뿐이다.
선생은 아호가 석문(石門)으로 동래인이며 홍문시독(弘文侍讀) 정환(鄭渙)의 현손으로 예천 용궁에서 태어났다. 이모부였던 우복 정정세로부터 학문을 배워 진사가 되었다. 깊은 학문과 훌륭한 인격을 아깝게 여긴 우복이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권했으나 광해군의 실정과 당파로 싸움이 끊이지 않는 정국(政局)을 보면서 초야에 묻혀 살기를 원했다. 이윽고 터진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더 시끄러워지자 세상과 아예 담을 쌓기 위해 첩첩 산중인 이곳으로 이주해와 아름다운 정자 경정(敬亭)을 짓고 연못을 파 상서로운 돌이 가득한 못이라는 뜻에서 서석지라 이름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소요하며 학문을 연마했다. 그는 사우(四友)라 하여 매(梅), 국(菊), 죽(竹)과 함께 소나무를 좋아했고 그 다음으로 모감주나무를 좋아해 이 나무의 조경적 가치를 가장 먼저 인식했던 것 같다.
일행이 연못을 둘러보고 있는 사이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당황하기는커녕 경정에 앉아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연꽃에 떨어지는 비 소리를 즐기는 여유를 보였다. 그러나 일정상 더 지체할 수 없어 나서는 우리들에게 대접을 못해 미안하다는 마을 어른을 뒤로하고 발길을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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