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어사 박문수가 죄인을 다스린 솔례마을 앞 느티나무

이정웅 2009. 6. 21. 07:26

 어사 박문수가 도둑을 심문했다는 솔레마을 앞의 느티나무

 현풍곽씨의 자랑 십이정려각

 명 어사 박문수

어사 박문수가 죄인을 다스린

솔례마을 앞 느티나무

달성군 현풍면 대리(大里)는 행정구역이름 보다 솔례(率禮)로 불러주기를 더 좋아 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청백리 곽안방, 천출효자 곽의창 유창, 의병장 곽재우(郭再祐,1552~1617), 순국대절의 곽준, 파리장서사건을 주도한 곽종석(郭鐘錫, 1843~1911) 등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명문 현풍 곽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이다.

구마고속도로 현풍 나들목에 내려 구지공단으로 난 옛길을 조금가면 오른 쪽에는 충신, 효자, 열녀를 많이 배출한 집안이라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12정려각(대구시 문화재 자료 제29호)이 있고, 왼쪽에 보호수 회화나무와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으며, 그 가운데 아담하게 조성된 조경지에 몇 개의 비석과 함께 면우(俛宇, 곽종석의 아호)의 우람한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솔례는 현풍곽씨의 본향이다. 대구를 본관지로 하는 여러 성씨가 있지만 이 처럼 마을이 잘 보존 된 동족(同族)마을은 찾기 어렵다. 시조 곽경(郭鏡, 1117~1179)은 중국 관서지방 출신으로 아호는 암곡(巖谷), 또는 초수(憔수)로 고려 때 귀화 1138년(인종 16)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랐으며 포산군(苞山君, 포산은 현풍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본관지 포산(나중에 현풍으로 바꿈)에 세거해 오늘에 이른다.

12정려각(十二旌閭閣)은 조선 조 선조 때부터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현풍곽씨가 배출한 충신 1, 효자 9, 열녀 6 등 16분을 기리는 건축물이다. 한 가문에 충신이나 효자 한 분을 배출해도 존경 받았던 시대였으니까 현풍곽씨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했던가는 짐작해 볼 수 있다.

그 한 예로 정유재란 때 순국한 곽준을 들 수 있다. 왜장 가등청정이 부족한 군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곡창지대 전라도로 진출하고자 했다. 조정에서는 길목인 황석산성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무장(武將)출신의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을 파견하여 안음(지금의 함양)현감 곽준(郭준, 1551~1597)과 함께 사수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두 사람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미처 날뛰다시피 하는 왜병들을 당해 낼 수 없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백 부사는 도망가 버렸다. 홀로 남은 곽준이 사력을 다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순절했다. 두 아들 곽이상과, 곽이후가 아버지를 대신해 전투에 참가했으나 그들 역시 전사하고,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들은 곽이상의 처 거장 신 씨마저 자결하니 2대 한 가족이 모두 전화(戰禍)를 입었다. 전후(戰後)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되어 일문삼강(一門三綱)이라 정려했다.

왼쪽의 큰 느티나무는 조선후기 명 어사(御使)로 힘없는 백성들의 억울함을 속 시원히 해결해주고, 비리를 저지른 탐관오리는 가차 없이 벌을 주어 핍박받는 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신화적인 인물 박문수(朴文秀, 1691~1756)와의 인연이 전해오고 있다.

이야기는 매우 간단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영남지방 민심을 살피기 위해 각 고을을 시찰할 때 마을의 도둑을 잡아 이 나무 밑에서 죄를 다스렸다.’라는 것이다. 무엇을 훔치려했던 도둑인지, 가까운 관아에 이첩하지 아니하고 왜 어사가 직접 신문(訊問)했는지 알 수 없다.

박문수는 아호가 기은(耆隱)이며 본관이 고령이다. 1723년(경종 3)에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올랐으나 이듬해 영조 즉위와 동시에 노론이 집권하면서 삭직당해 시련을 겪었다. 1727(영조 3)정미환국 이후 사서(司書)로 다시 벼슬길에 올라 그해 9월 영남암행어사로 나아갔다. 그 후 이인좌란 때 전공을 세워 경상도관찰사로 승진하고 공신에 뽑혀 영성군(靈城君)에 봉해진 분이다. 1730년(영조 6)대사성, 대사간, 도승지 등 요직을 거치고 이어 충청도암행어사로 나아가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고하고 대책을 세우도록 건의했다. 1737(영조 13) 다시 도승지를 거쳐 마침내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어 대감의 반열에 올랐다. 그 후 당쟁의 소굴인 안동서원을 철폐시킨 일로 노론의 공격을 받아 풍덕부사로 좌천되었다가 영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 1939년(영조 15 )함경도관찰사, 1741년(영조 17)에는 국왕을 호위하고 도성을 수비하는 어영대장이 되었다. 이어 기근으로 고통 받는 함경도지방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진휼사로 가서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경상도에서 곡식 1만석을 가져다주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1749년(영조 25)에는 호조판서, 1751년(영조 27)에는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1752년(영조 28)내의원제조로 있을 때 왕세손이 죽자 책임을 지고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우참찬에 올랐다.

그는 당파로는 소론에 속했으나, 영조의 탕평책을 적극지지 했다. 특히 개혁군주 영조와 호흡이 맞아 조세, 병무, 등 내정개혁과 지방의 가난한 백성들을 보살피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 외교에도 밝아 청나라를 두 번 다녀왔다. 66세로 돌아가셨으며 저서로 <탁지정례>와 <국혼정례>가 있다.

그가 솔례에서 도둑을 신문한 때가 어사로 있을 때인지 감사로 있을 때인지 불분명하고 그 사유가 무엇이었던 훌륭한 목민관과 인연은 즐거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