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사육신 김문기선생과 섬계서원 은행나무

이정웅 2009. 5. 30. 06:09

 수령 420여 년의 섬계서원 은행나무

 사육신 김문기선생을 기리는 섬계서원

 백촌 김문기선생 영정

 

나무를 찾아서 떠나는 여행은 나무가 자라는 상태를 보는 즐거움도 크지만 관련된 인물을 만나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의 삶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를 알아보는 즐거움도 크다. 김천의 섬계서원 은행나무를 보러가는 오늘의 여행도 그렇다.

서원의 주향은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1399~1456)선생으로 충북 옥천 태생이다. 4살 때 말을 배우고 문자를 알았다고 한다. 28세가 되던 1426년(세종 8)사마시와 문과(文科)를 합격했다. 그러나 부친상으로 바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복(服)을 마친 뒤에도 매일 성묘를 하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뒷날 사람들이 마을 이름 백지리(白池里)를 효자동(孝子洞)으로 바꿨다고 한다. 1430년(세종 12) 예문관 검열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어 사간원좌헌납, 경상도 아사, 의정부사인을 거쳐 53세 때인 1451년(문종 원년) 지방관으로서는 최 고위직이라고 할 수 있는 함길도 관찰사가 되었다. 1453년(단종 원년) 2년여의 임기를 마치고, 이어서 내직으로 돌아와 형조(刑曹)참판이 되었다가 같은 해 11월 이번에는 함길도도절제사(都節制使)로 나아갔다. 도절제사는 행정권과 병권을 힘께 수행하는 직책으로 관찰사보다 높다고 할 수 있다. 이후 58세 때인 1456년(세조 2)에는 공조(工曹)판서로 승진했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품으로 청렴하고 강직했기 때문에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대군(大君) 수양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김종서 · 황보인 등 많은 원로대신을 죽였던 계유정난 때 그는 병조참판이었다. 반수양파였던 그가 이 난리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세조에 반기를 든 ‘이징옥난(李澄玉亂)’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 후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로 승진했으나 그렇다고 고명신하였던 그가 세조의 불순한 행동을 지지할 리 없었다. 오히려 성삼문, 박팽년 등 세칭 사육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채포되어 1456년(세조 2) 모진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고 아들 현석(玄錫)과 함께 순절했다. 그 후 영조 때 후손 정구(鼎九)가 상소를 올려 1731년(영조 8) 복관(復官)되고 1778년(정조 2)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았고 500여 년이 지난 1977년 9월 22일 국사편찬위원회는 마침내 백촌을 원사육신(原死六臣)의 한 분으로 판정했다.

한 때 경상도 아사(亞使)를 지내며 금호강일대를 소요하였고, 임란 때 9세손 김응수(金應守)가 충북 영동에서 대구에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북구 노곡동에 태충각(泰忠閣)을,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에는 금회영각(琴回影閣)을 세워 그를 기리며 살고 있어 대구와도 무관한 인물이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백촌의 후손인 산중 김태락님과 함께 김천시 대덕면 조룡리 섬계서원(剡溪書院)으로 향했다. 주향으로 백촌, 배향으로 맏아들 현석(玄錫) 그리고 별묘에 여말의 대학자 장지도(張志道), 그의 제자 윤은보, 서즐 모두 5사람을 기리는 서원이기도 하지만, 수령이 420년이 된 큰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0호)도 보기 위해서다.

동곡 할매집에서 칼국수와 돼지고기 한 접시로 점심을 때우고 김천으로 향했다. 성주에 도착하니 참외축제로 성밖숲이 시끌벅적하다. 벽진을 지나 성주땜을 왼쪽으로 끼고 가는 길은 조선중기의 성리학자 한강(寒岡)이 노래한 무흘구곡(武屹九曲)의 중심부로 경승 또한 아름다워 도시에서 찌든 먼지를 씻어주기에 알맞은 곳이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온산을 덮고 있는 신록(新綠)이 눈부시게 싱그러웠다.

자료상으로만 본다면 김천시는 다른 지역에 비해 노거수가 적다. 실제로 적은 것인지 아니면 담당 공무원이 조사를 태만히 해 그런지 알 수 없으나 생태기행이 일상화된 지금 나무도 하나의 관광자원인 만큼 많이 발굴하여 홍보할 가치가 있다. 그러나 김천시는 천연기념물 1그루와 경상북도기념물인1그루가 전부인데 공교롭게도 은행나무이자 모두 대덕면에 있다. 따라서 큰 수고를 하지 아니하고도 다 볼 수 있다.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 먼저 당도한 마을은 추량리로 서산 정씨와 성산배씨의 집성촌이다. 이곳이 은행나무(경북도기념물 제91호)는 서산인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낸 행촌(杏村) 정처우(鄭處祐, 1563~?)와 그의 사촌으로 호가 역시 행촌인 정사용(鄭士鎔, 1564~1608) 두 분이 심었다고 한다. 학문이 높아 지역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당시 유학자였던 한강 정구선생, 육일헌 이홍량선생과 종유했다고 한다. 두 분이 공자의 행단(杏亶)을 본 따 만년에 심은 것이라고 하니 400여 년 전이다. 생육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마을 한 복판에 심어져 있을 뿐 아니라, 워낙 커서 전체모습을 담을 수가 없었다.

이어 섬계서원으로 향했다. 1802년(순조 2)에 지어졌다고 한다. 섬계 언덕에 자리 잡아 주변 풍광과 잘 어울렸다. 서원 뒤 왼쪽 모서리에 두 줄기로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는 백촌의 드높은 공적이 새롭게 평가된데 따른 고마움을 표시라도 하려는 듯 생육상태가 좋았다. 특히 유주가 많았다. 수령으로 보아 서원이 들어서기 훨씬 전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저절로 싹이 돋지 않는 은행나무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누군가 일부러 심은 것이 분명하나 더 이상 상고할 자료가 없어 아쉽게도 발길을 돌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