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자족재 신봉석선생과 회화나무

이정웅 2009. 6. 2. 22:09

 자족재 신봉석 선생이 후손 중 삼공과 같은 큰 인물이 나올것을 염원하며 심고 시를 지은 회화나무

 자족재 오른쪽에 자라는 향나무 줄기가 용틀임하는 자세로 자라 신비스럽다. 특이히게 한 줄기에는 붉나무가 기생하고 있다.

 자족재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은 향나무가 왼쪽에는 회화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으며 그와 말채, 느릅나무 노거수도 있다.

 

옛 상사였던 신종웅 본부장이 한 권의 책을 보내왔다. 문인협회 회원으로 자주 책을 받는 나에게 있어 특별한 선물은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은 달랐다. 선조가 남긴 유고(遺稿)를 부친께서 출판하려다가 못한 것을 대를 이어 완성했기 때문이다. 내용도 궁금하지만 우선 책에 실린 재실(齋室) 옆의 큰 향나무가 인상적이었다. 고맙다는 전화를 하면서 한번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언제 시간을 내 가자고 했다.

의성에 있는 수식목(手植木)으로 사촌의 송은 김광수선생이 심은 향나무(경북도 기념물 제107호)가 유일한 줄 알았는데 350여 년 전 자족재가 심은 나무가 있는 것을 새로 알았기 때문이다. 본관이 아주인 자족재(自足齋) 신봉석(申鳳錫)선생은 1631년(인조 9)자헌대부지중추부사를 지낸 아버지 신견(申堅)과 어머니 평산신씨 사이에 태어났다. 고려 말 역성혁명을 반대하며 구미 금오산으로 은거한 야은 길재와 달리 의성 단밀현 만경산으로 낙향한 국천효자(國薦孝子)이자, 전라도안렴사를 지낸 퇴재 신우(申祐)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해 7세에 서전(書傳, 주자가 그의 제자 채침으로 하여금 서경에 주해를 달아 편찬한 책)을 배울 것을 청하자 유약(幼弱)해서 너무 빠르다며 허락하지 아니하였다고 한다. 사기(史記) 중에서 특히 명군과 충신의 사적(事跡)을 좋아해 사람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13세 때에 아버지 명으로 어량(물고기를 잡는 도구)을 보러가서는 잉어 한 마리만 달랑 건져와 그 까닭을 물었더니 차마 다 잡아 올 수가 없었다고 하여 미물(微物)에도 깊은 애정을 가진 그를 보고 주위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 또한 효성도 지극해 가슴앓이를 아버지를 위해 기왓장을 따뜻하게 데워 가슴에 품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대변을 직접 맛보며 병세를 살폈다고 한다. 아내에게는 어진 남편으로, 동기간에는 남다른 우애로, 자식들에게는 엄격한 아버지로 사셨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효종(孝宗)이 불시에 방문하여 친 시험에서 장원을 했으나, 그의 다른 작품에 문제가 있다며 대간(臺諫)이 간하여 취소되고 대신 상으로 종이 10속, 붓 40자루, 먹 30정을 하사받고 낙향하여 자족재를 짓고 스스로 호로 삼아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에 몰두했다.

높은 식견과 고매한 인품이 알려지면서 홍성귀 등 수령들이 수시로 찾아와 정사와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그는 한가하게 글만 읽는 선비가 아니라, 현실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1677년(숙종 3)국정의 다섯 가지 폐단의 시정을 요구하는 오폐소(五弊疎)를 상소했다.

즉 조세와 부역의 폐단, 군역(軍役)의 폐단, 부익부빈익빈, 영남인의 차별, 공명정대한 인재 등용(登用)을 시정하거나 개혁을 요구하고 또한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실시할 것을 건의했다. 1704년(숙종 30) 돌아가시니 향년 74세저서로 <자족재집>을 남겼다.

안동인 홍승목(洪承穆)은 <자족재집>의 서문에서 ‘공은 영남의 추로지향에서 태어나 절의한 자태로서 실학에 뜻을 두어 서책의 문에 탐닉하였고 덕행의 아름다운 일에 돈독히 하여 자애롭고 자상하고 효성스럽고 공손하였다. 부모형제의 말에 어김이 없었으며 스승을 따라 승습(承襲)하지 않고 초연히 홀로 성현의 책에 이르러 끝까지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하생략’ 하였다고 했다.

선생은 자족(自足)의 도를 ‘고상한 것도 아니고 원대한 것도 아니며 다만 마음에 있을 뿐이다’라고 하며 한적한 시골에서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에 만족했다.

오월의 마지막 날 신(申) 본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같이 가지는 것이다. 운전을 못하는 나를 직접 차를 몰고 왔다. 의성읍 용연리 일명 새못안은 불과 한 시간 정도였다. 마을 뒤쪽에 자리 잡은 지족재가 보였다. 오른쪽은 향나무가 왼쪽은 큰 회화나무가 버티고 있었다. 사진에서 보았던 향나무는 용틀임하는 자세를 취해 생각보다 더 아름다웠다. 또한 신기하게도 줄기에 붉나무가 기생하고 있었다. 멀리서 뻐꾸기소리가 들여왔다. 왼쪽의 회화나무는 지족재가 직접 심었다는 두 그루 중 한 그루가 분명해 보였다.

동산의 들길 동쪽 저 두 그루 회화나무는 / 같은 때에 심어 크기가 서로 같구나. / 음음한 푸른 잎은 다시 덮개를 이루고/ 점점이 노란 꽃은 흡족히 바람 받네./ 밝은 달은 조롱 끝에서 빛을 숨기고/ 날아다니는 꾀꼬리 소리 나무 넘어 영롱하네. /주인은 감히 왕공(王公)의 뜻에 비기어/덕을 심으면 집안에 복이 형통하리라.

이상은 ‘문 앞의 두 그루 회화나무’라는 시(詩)이다. 그는 회화나무를 심으며 중국 송나라 사람 왕호가 자기 마당에 회화나무 세 그루를 심고 ‘내 자손은 반드시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될 것이다.’하였는데 뒤에 과연 둘째 아들이 재상에 올랐다는 고사(故事)까지 인용했다. 주변에는 비슷한 굵기의 느릅나무와 말채나무 등 큰 나무들이 다양하게 자라고 있어 놀랐다. 줄기가 일부 고사된 말채나무만 제외하고는 모두 보호수로 지정해도 손색없는 노거수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