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촌 최상룡이 봉무정을 짓고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
봉무정, 문화재 안내판에는 1875년(고종 12)에 봉촌 최상룡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봉촌은 그보다 26년 전인 1849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수정이 필요하다.
태조 왕건이 견훤군사에 패해 도망가면서 잠시 앉았다는 독좌암, 주변에는 쇠말뚝이 박혀있고 비닐이 덮혀 있는 등 방치되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벌인 팔공산 전투는 우리 역사가 뒤바뀔만한 큰 격전장이었다. 특히, 왕건이 대패함으로 승자인 견훤과 달리 대구지역에는 그가 탈출했던 길과 그로 인해 생긴 지명이 많이 남아있어 천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있는 전설이 되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현장은 가꾸기에 따라 좋은 상품이 될 수 있으므로 대구시나 관할 동구청은 물론 시민단체들도 이들 지명과 탈출로를 답사나 관광코스로 개발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나 읍지 등 사료의 기록이 너무 간소한데 비해 대학에 몸담고 있는 정통역사학자들은 연구를 외면하고, 향토사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연구를 하다 보니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나 역시 <팔공산을 아십니까. 1993,도서출판 그루>에서 이런 오류를 범해 부끄럽게 생각하며 빠른 시일 내 바로잡으려고 노력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묘, 살내, 시량리, 등 현장을 둘러보던 중 봉무동의 독좌암(獨坐巖)을 찾았다. 이 바위는 파군재 등에서 패한 왕건이 도망가다가 잠시 혼자 앉았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바위다.
처음 찾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익숙한 길로 접어들었으나 공사를 시행하고 있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되돌아 나와 건너편으로 갔다. 한순간 깜짝 놀랐다. 관리가 소홀했던 봉무정(鳳舞亭,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8호)은 주변까지 말끔히 정비되어 몰라보게 달라져 있는 반면에 독좌암은 위치가 삐뚤어지고, 일부분이 천막으로 덮여있는 등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봉무정 옆에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뿌리와 줄기는 말라빠졌지만 그래도 겨우 목숨이 붙어있는 큰 회화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봉무정은 ‘행정사무를 보던 곳으로 개인이 건립한 것으로는 대구지역에는 하나 밖에 없는 공공건물’이라는 안내판의 설명과 달리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봉촌 최상룡(崔象龍, 1786~1849)이 만년(晩年)에 여러 벗들과 어울려 학문을 강론하고, 예(禮)를 익히며, 투호놀이 등 여가를 즐기고,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하면서 여생을 즐겁게 보내고, 향약(鄕約)을 통해 마을의 풍속을 바로 잡으려고 지었으며’ 이 때 오동나무와 대도 심었다고 한다. 회화나무 역시 이 때 심은 것이 같다.
설립자 봉촌(鳳邨) 최상룡은 퇴계-김성일(학봉)-장흥효(경당)-이현일(갈암)-이재(밀암)-이상정(대산)-정종로(입재)로 이어지는 퇴계학맥을 계승한 학자로 <사자변의(四子辨疑)> 등 여러 저서를 남긴 분이다.
이웃 마을 옻골을 개척한 대암 최동집의 후손으로 1786년(정조 10) 아버지 최흥한(崔興漢)과 어머니 영산신씨(靈山辛氏) 사이에 태어났다. 7세 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풍악을 울리며 마을 앞을 지나가자 또래의 아이들이 앞 다투어 구경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그는 홀로 벽을 바라보고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신기해 한 어른들이 까닭을 물었더니 ‘나 역시 공부를 열심히 해서 합격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해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어릴 때는 칠실(漆室) 최화진(崔華鎭, 1752~1813)에게 배우고 커서는 청백리로 이조판서를 지낸 우복 정경세의 6세손인 상주의 입재 정종로(鄭宗魯, 1738~1816)에게 배웠다. 이 때 같이 수학한 동문은 유심춘, 이원조, 최효술 등이다. 1822년(순조 22)마침내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다. 그는 집안이 가난했지만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배우려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독암서당(獨巖書堂)을 짓고 본격적으로 후학을 양성했다.
한 때 대구지방 생원 · 진사출신들의 친목 장소인 사마소(司馬所)가 관리소홀로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앞장서서 이를 보수하고 운영에 필요한 경비를 확보하기 위하여 논밭을 마련하는데도 크게 기여해 지역 유림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대사성 홍직필(洪直弼, 1776~1853)이 학문이 높다는 말을 듣고 찾아 갔는데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크게 기뻐했으며 그 후 영남 선비들을 만날 때마다 봉촌의 높은 학문과 인간됨을 극구 칭찬했다고 한다.
자료를 더 보강하기 위해 얼마 후 다시 봉무정을 찾았다. 이번에는 1970년대 이 마을 동장을 역임했던 최재화(崔在和)님으로부터 봉촌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었으며 뿐만 아니라, 일대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이시아폴리스가 자금을 지원하고 동구청이 주관해 봉무정을 비롯해 일대를 정비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당시 담당 공무원이 지역의 문화자산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팽개쳐진 천년 전설의 독좌암도 바로 놓고, 다 죽어 가는 늙은 회화나무도 생육환경을 개선해 건강을 유지하도록 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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