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진성현감 손관과 수령 600년의 혜산서원 차나무

이정웅 2009. 10. 13. 16:44

 

 진성현감을지낸 손관이 경북 안동에서 밀양으로 이거할 때 가져와 심었다는 수령 600년의 차나무

 일직손씨 오현을 배향하는 혜산서원(왼쪽이 수령 600년의 차나무)

 감

 진주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루각의 하나인 밀양 영남루

 영남루에서 바라 본 일몰

진성현감 손관과 수령 600년의 혜산서원 차나무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는 본관지가 안동 일직(一直)인 손씨의 집성촌이다. 마을 한 가운데 자리 잡은 혜산서원(惠山書院)에는 정평공(靖平公) 손홍양(孫洪亮, 1287~1379), 격재(格齋) 손조서(孫肇瑞,1412~1473),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1553~1634), 문탄(文灘) 손린(孫燐,1566~1628), 윤암(윤암) 손우남(孫宇男,1564~1623) 등 모두 다섯 분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부터 다섯 분을 모신 것이 아니고 격재 한 분만 배향하기 위해 1753년(영조 29) 서산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그 후 1868년(고종 5) 전국의 수많은 서원이 훼철될 때 서산서원 역시 거센 바람을 이겨내지 못했다. ‘서산고택(西山古宅)’ 또는 ‘철운재(徹雲齋)’라는 편액만 달고 명맥을 유지해야 했다. 그 후 1971년 마침내 복원하게 되니 배향하는 분도 네 분을 더하고 이름 또한 ‘혜산’으로 바꾸었다.

본관지 안동에서 왜 이곳으로 옮겨 살게 되었는지? 배향된 다섯 분의 면면이 어떤 분인지? 또 하나 전해 오는 이야기 경북 안동에서 가져와서 심었다는 600년 된 차나무는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지 궁금했다. 들판이 황금물결로 넘실대는 시월 초순 수필가 최현득님, 애림유치원 성명자 원장님 문인화가 난초향기님과 함께 혜산서원을 찾았다. 감의 주산지 청도와 접해서 그런지 집집마다 주황색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고가가 즐비한 것이 반촌의 모습이 역력했다.

차나무조차 꽃을 피우고 있어 때를 맞춰 찾아온 것 같았다. 그러나 서원은 개방되어 있어도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냥 구경해야 했다.

배향된 다섯 분 중에 우선 이곳에 뿌리를 내려 가문을 빛낸 손조서(孫肇瑞) (1412―1473)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호는 격재이며 1412년(태종12) 경북 안동 일직면 송리에서 출생해 아버지를 따라 밀양 용평리 증벌촌에서 성장했다.

1432년(세종14) 20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1435년(세종17) 23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사헌부감찰, 병조정랑을 거쳐 집현전학사로 박팽년, 성삼문 등과 한림원에서 함께 근무했다. 1453년(단종원년) 외직으로 옮겨 봉산군사로 재임 중에 1456년(세조2) 성삼문 등이 단종임금의 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하자 결연히 벼슬을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세조가 여러 번 불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에 능했으며 도학이 깊어 심경연의<心經衍義>, 근사록연의<近思錄衍義>를 지었고 김굉필, 정여창 등 거유들이 공에게 사사하였고 문장, 학문으로 점필재와 아울러 당대 최고 선비였다. 많은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기위해 원근에서 찾아왔으나 문을 닫고 살다가 1473년(성종4)에 돌아가시니 향년 61세였다. 1812년(순조12) 이조참의, 양관제학에 증직됨과 함께 그 자손에게 잡역을 면제하게 했다. 유집 1권이 전하고 있다.

이상이 일직 손문이 밀양에 입향하여 가문을 일으킨 조선초기의 문신 격재 손 선생의 이력이다. 다음 궁금한 것은 서원 안에 있는 600년 된 차나무다. -사실 이번 혜산서원 방문 목적이기도 하다. -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장흥고사와 진성현감을 지낸 격재의 아버지 손관(孫寬, ?~? )이 안동 일직에서 외가인 밀양 산외로 들어올 때 가져와 심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안동이 차나무 재배의 적지가 아니라는 데 있다. 관목(灌木)으로 천년도 더 살고 있는 영주 부석사의 골담초(일명 선비화)와 비교할 때 600년이라는 세월은 그리 긴 것이 아니고,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일이 많아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드려야 하겠지만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안동에서 가져온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필자는 격재가 영남사림파의 종조로 불리는 점필재 김종직선생으로부터 얻어 심은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격재와 점필재는 같은 밀양출신이기도 하지만 학문적으로도 통하는 학자이며, 두 분 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처향에서 자랐으니 다른 친구들보다 동질감이 더 크고 막역했으리라 짐작된다.

점필재가 노모를 모시기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함양군수로 있을 때, 차를 공물(供物)로 바치라는 규정에 따라 재배하지도 않는 차를 구하기 위해 군민들이 하동 등 인근 차생산지에서 비싼 값으로 차를 구입해 세금을 내는 것을 목격했다. 훌륭한 목민관인 그는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몸소 차나무 씨앗을 구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관영다원(官營茶園)을 조성했다. 이때 친구 사이인 격재에게 몇 그루를 주었을 것이고 그것을 가져와 심은 것이 아닐까한다. 비약이기는 하나 안동에서 가져 올 상황이 아닌 점을 감안하고, 두 분의 관계를 감안하면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밀양의 향토음식점에서 잉어찜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퇴로리 삼은정으로 갔다. 국내최대의 대왕송이 있는가 하면 금송, 편백나무, 삼나무, 주목, 회양목, 목서 등 상식을 뛰어넘게 크거나 진귀한 나무들이 있어 모두들 감탄했다. 때마침 씨가 떨어져 저절로 자란 집안에 심으면 우환(憂患)이 없어진다는 무환자나무 어린 묘목이 있어 기념으로 서너 그루씩 캐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