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평공 손홍량이 20여 세 때 직접심었다는 수령 700여 년의 은행나무
공민왕이 손수 그려 주었다는 정평공의 초상화
은행나무 둥치 원 줄기는 죽고 새로 돋은 맹아
정평공이 심었다는 수식비(手植碑)
정평공 손홍량의 유허비각
안동시가 스스로 한국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부하듯이 많은 명문가를 배출한 고장이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크게 기여했던 안동김씨, 안동권씨, 안동장씨를 비롯해 풍산유씨, 풍산김씨, 예안이씨 등이 그렇고 일직손씨(一直孫氏)가 또한 그렇다.
일직 손씨의 시조는 고려시대 중국에서 귀화해 온 손응(孫凝)이다. 원래는 순(荀)씨였는데 제8대 현종의 이름과 같다하여 손(孫) 씨로 하사(下賜)했다고 한다.
일직손문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여말의 문신 손홍량(孫洪亮, 1287~1379)으로부터 비롯한다.
호가 죽석(竹石)인 그는 1287년(충렬왕 13) 안동시 일직면 송리에서 태어났다. 23세 되던 1309년(충선왕 1)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1348년(충목왕 4) 첨의평리로 있을 때 밀직부사 김인호(金仁浩)와 함께 정조사(正朝使, 새해를 축하하러 가던 사신)로 원나라를 다녀왔다. 1349년(충정왕 1) 추성수의동덕찬화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功臣)에 봉해지고 도첨의찬성사를 거쳐 전곡(錢穀)의 출납과 회계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삼사(三司)의 책임자인 판삼사사(判三司事, 종일품)가 되었다. 이듬해 복천부원군(福川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51년(충정왕 3)나이가 많다며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이때가 그이 나이 65세, 충선왕을 시작으로 충숙, 충혜, 충목, 충정 5왕조 40여 년 나라를 위해 봉사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연을 벗 삼아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원의 간섭이 극심했던 때였다.
은퇴 후 10년의 세월이 흐른 그의 나이 75세 때,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 때 공민왕은 난을 피해 안동으로 오게 된다. 노구를 이끌고 나아가 왕을 맞아 수습책을 건의하니 왕이 감격하여 ‘그대는 진실로 곧은 사람(子誠一直之人)’이라며 치사했다고 한다.
난이 평정되자 왕은 개경으로 돌아갔다. 이 때 손홍량이 개경으로 올라가 무사히 귀경하고 난이 평정된 것을 축하하자 ‘늙을수록 더욱 도탑다(老而益篤)’고 하며 친히 초상화를 그려주고 산호지팡이와 방석을 하사하며 ‘두 아들도 나를 섬기게 하라’하였다고 한다.
이어 고향으로 내려오려고 하니 이제현, 이색 등 이름 있는 선비들이 모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주고 시(詩)로서 애석한 마음을 표했다고 한다.
목은 이색은
그대 있어 조정이 깨끗하더니
그대 가니 난리로 시끄러웠네.
또한 일성군 정사도(鄭思道, 1318~1379)는
늙어도 충성심은 변함없어 임금을 뵈니
지팡이 내리시니 영광도 커라
온 장안 덕을 기려 보내오니.
고이 짚고 고향 길 평안하시라.
라고 했다.
1379년(우왕 5) 천수를 누리고 93세에 돌아가시니 직성군(直城君)에 봉하고 정평(靖平)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에 지역의 사림이 타양서원을 지어 공의 위패를 모셨고, 그가 자라고 말년을 보낸 고향마을에 유허비가 세워졌다.
병화 등을 거치면서 많은 유물이 멸실되었으나, 공민왕이 직접 그려준 초상화는 현재 밀양 세덕사에, 20세 때 직접 심었다는 700여 년이 된 은행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 44호), 자랄 때 마시던 우물은 안동시 일직면 송리에 현존한다.
일직손문은 대구지역사회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으니 가장 돋보이는 인물이 정평공의 11세손 모당 손처눌(孫處訥, 1553~1634)이다. 대구 수성리에서 출생한 그는 전경창과 정구선생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임진왜란 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으나 연년으로 부친과 모친상을 당해 크게 활동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유재란에서는 전공을 세워 고을 수령이 조정에 표창을 상신하려하자 극구 만류했다. 이어 전란으로 피폐해진 대구향교와 연경서원 중건에 앞장섰다. 이괄의 난, 정묘호란에도 창의했다. 특히 그가 대구지역에 끼친 영향은 유시번 등 208명의 제자를 길러냄으로 대구의 문풍을 진작시킨 점이다. 낙재 서사원과 함께 대구사림을 주도하면서 문향의 도시로 발전하는데 거름 역할을 했다.
정평공의 체온이 살아 있는 송리 은행나무는 오랜 연륜에 비해 그리 크지 않았다. 원 줄기는 죽고 맹아(萌芽)가 돋아 자란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끈질긴 생명력이 바로 일직손문의 문풍(門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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