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서산정씨(瑞山鄭氏) 3영수(靈樹)의 하나 가남정 느티나무

이정웅 2009. 11. 8. 15:06

 

 서산정씨 11세손 금월헌 정인함이 심었다는 수령 400여 년의 느티나무

 거대한 느티나무 뿌리 수령이나 품세로 보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해도 손색이 없는 노거수다.

합천군수가  2005년 11월에 지정한 보호수 표지석

 정인함, 정인기, 정인휘, 정인지 4형제의 재사인 가남정

 가남정과 느티나무

 가남정 앞을 흐르는 야천(倻川)가야산에서 발원해 홍류동을 거처 흐른다.

 

 

 금월헌 정인함의 유허비

 

경북 김천시 대덕면 추량리에는 서산정씨 11세손 정처우(鄭處祐, 1563~?) 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은행나무 한 그루(경상북도 기념물 제91호)가 있다. 얼마 전 같은 면 조룡리 섬계서원에 있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0호)를 보러 가다가 잠시 들러 본적이 있다. 마을 한 복판에 우뚝 서 있는 장대한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따라서 언젠가 다시 한 번 방문하여 심은 이를 보다 자세히 알고 싶었다. 면사무소를 통해 이장 정종걸씨의 전화번호를 입수했다. 공교롭게도 서정(瑞鄭)의 후손이었다. 수식자(手植者)의 행장(行狀)이나, 실기 또는 문집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내일 방문할 계획이니 혹 집안 어른 중 알만한 분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조상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 어디 그 이장(里長) 뿐이랴. 컴퓨터를 열어 서산정씨대종회홈페이지에 문을 두드렸다. 족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세대들로 넘쳐나는 세태에 그들을 위해 시대의 변화에 잘 맞추어 깔끔하게 만들어 놓아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놀라게 한 것은 ‘서정의 영수(靈樹) 삼품도’였다. 서산정씨의 영혼이 깃든 3그루 나무 사진이라는 뜻인 것 같다.

즉 경남 합천군 야로면 하림리 751번지에 있는 금월헌 정인함이 심은 느티나무, 김천시 대덕면 추량리 1031-2에 있는 행촌(杏村) 정처우가 심은 은행나무, 같은 시, 같은 면 조룡리 447-1 행정(杏亭) 정사용(鄭士鎔, 1564~1608)이 심은 은행나무였다. 행촌과 행정이 심은 나무는 보았지만 금월헌이 심은 느티나무는 보지 못했기 때문에 김천 가는 것을 파기하고 합천으로 향했다.

서산정씨는 본관지가 충청도 서산이나 본향은 중국 절강성이다. 송나라가 망하자 고려로 망명하여 서산 간월도에 정착한 원외랑의 후예로 맏아들 양열(襄烈) 정인경(鄭仁卿, 1241~1305)이 고려에 많은 공을 세워 서산군(瑞山君)에 봉해짐으로 본관지가 되었다. 이런 서정이 경상도 뿌리를 내려 합천, 김천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니 대표적인 분이 영의정을 지낸 내암(來菴)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이다. 그는 최영경, 오건, 김우옹, 곽재우와 함께 남명 조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1573년(선조 6) 학행으로 천거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서인의 정철 등을 탄핵하려다가 오히려 해직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정여립 옥사사건을 계기로 북인의 영수가 되었다. 그 후 임란에서는 영남의병장으로 눈부신 활약을 펼쳐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광해군이 중용하면서 정국을 주도했다. 스승인 조식(曺植, 1501~1572)을 문묘에 배향하려는 노력을 시도하면서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전국의 유림들로부터 크게 지탄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마침내 영의정에 오른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1623년( 인조 1) 참형(斬刑)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했다. 이야기가 다소 벋어났지만 명문 서정이 17세기 초 조선사회를 주도했던 인물을 배출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상은 일반적인 사서의 기록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이 광해군의 정치력과 관계없이 서인의 집권 욕에서 비롯된 것으로 재평가 받는 것처럼 내암의 정책(政策) 역시 훗날 재평가되리라 믿는다.

88고속도로를 타고 야로(冶爐)로 향했다. 자주 해인사를 찾아 잘 아는 지역이라 생각했지만 몇 번 물어서야 하림에 도착했다. 바로 큰 길옆이었다.

노송이 가남정(伽南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0호) 주변을 에워싸고 바로 앞은 맑은 물이 흘러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금월헌(琴月軒) 정인함(鄭仁涵, 1546~?)이 직접 심었다는 느티나무는 정자 바로 앞에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서 있었다.

괴목(槐木)을 심은 금월헌은 내암의 사촌동생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인생관은 다소 달랐다. 내암이 학행으로 벼슬길에 오른 반면 금월헌은 대과에 합격해 출사했으며, 다소 과격한 내암에 비해 금월헌은 온건했다. 그러나, 내암이 경상도의병장으로 활약할 때에는 더불어 왜적 토벌에 앞장섰다.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금월헌은 어가호위에 정성을 다해 호종공신 2등에 뽑혔다. 광해군 때에 내암이 지나치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낙향해 은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 후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공교로운 것은 내암도 그렇지만 서정의 3영수를 남긴 사람 모두 양열공의 11세손(世孫)라는 점이다. 이런 점을 볼 때 이때가 서정이 가장 전성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명목을 살펴보며 늘 아쉬운 점은 관리문제다. 이 3그루의 영수(靈樹)는 거의 비슷한 시기 즉 400여 년 전에 심어진 나무들이다. 그런데도 행정공이 심은 나무는 천연기념물로, 행촌공이 심은 나무는 도(道)기념물로 금월헌공이 심은 나무는 그도 저도 아닌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되어 각기 품격이 다르다. 문중의 무관심도 이유겠지만 담당공무원의 무관심이 더 큰 문제다. 지역의 자랑스러운 나무를 찾아내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것이 당연한 책무인데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