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의 선비 이요당 주이(1515~1564)가 벼슬을 버리고 호연정을 짓고 심었다는 은행나무
특이한 공법으로 지었다는 호연정 정면
호연정 측면
호연정 현판 호연(浩然)은 호연지기의 준말이라고 한다.
호연정 앞을 흐르는 황강
후손이자 한국화가인 주영근님 작 호연정
이요당 주이선생과 호연정 은행나무
꿈에 부풀었던 고교시절을 경북 상주에서 보내고 처의 고향마저 상주인 나는 경남 합천에 상주(尙州)를 본관으로 하는 주씨(周氏)들의 집성촌이 있다는 사실이 퍽 흥미로웠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을 세운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1554)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함안 칠원으로 이사 가기 전 7살까지 살았다는 사실도 새로 알게 되었다.
상주 주씨는 중국 주(周)나라 난왕(赧王)의 후손들로 알려져 있다. 시조 주이(周頤)가 당나라에서 병부시랑을 지내다가 786년(원성왕 2) 사신(使臣)으로 신라에 왔다가 귀화했으며 그 후 상주지역 총관(摠管, 군사를 지휘하는 직책 )으로 있다가 퇴임 후 그 곳에 정착하여 세거함으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는 집안이다.
이런 상주 주씨가 합천에 자리 잡은 것은 유(瑜)라는 분이 고려가 망하자 이곳에 은거하고 부터라고 한다. 이런 몇 가지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합천군 율곡면 문림리 호연정(浩然亭,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98호)을 찾았다.
마을 이름 문림은 원래 ‘민갓’ 또는 ‘문갓’으로 불렀는데 중종(中宗)이 주세붕에게 출생지를 물어 ‘민갓’이라 하였더니 ‘선비가 숲같이 많이 나라는 뜻으로 문림(文林)으로 하사했다’고 한다.
겨울답지 않는 포근한 날씨였다. 다만 안개가 자욱해 먼 산이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율곡면의 최고봉인 대암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황강이 굽어보이는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호연정은 조망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경내의 나무들이 너무 무성해 가지를 좀 쳐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정자도 보고 싶었지만 정자의 주인이었던 주이(周怡, 1515~1564)가 심었다는 400야 년이 된 은행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아버지 주세귀(周世龜)와 어머니 창원최씨(昌原崔氏) 사이에 태어났다. 아호 이요당(二樂堂)은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 즉 ‘지혜 있는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물과 같이 막힘이 없음으로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의리에 밝고 산과 같이 중후하여 변하지 않음으로 산을 좋아한다.’는 말에서 따왔다.
일찍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병으로 눕자 정성으로 간호를 해 낫게 하자 주위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특히 당숙(堂叔)인 주세붕 선생은 어린 그를 무릅 위에 앉히고는 ‘네야말로 우리 집안의 기둥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1546년(명종 15) 대과에 급제해 성균관 학정·전적, 이조·형조랑관, 춘추기주관 등 여러 벼슬을 거처 37세 때인 1551년(명종 6)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황제 세종이 소나무분재를 보여주면서 시를 지으라고 하자 즉석에서
작은 모래 분에서 자란 반 척의 소나무
한 평생 풍상 무릅쓰고 옹종하게 늙었네.
나는 아노라 저 소나무 하늘 높이 자라지 않는 뜻을
사람이 곧으면 용납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올곧은 사람이 등용되지 못하는 것을 빗대어 쓴 것이라고 한다. 황제는 크게 칭찬하고 그를 일러 ‘직불용(直不用)선생이라 했다고 한다. 그 후 우리나라에서 사신이 갈 때마다 그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예안현감을 마지막으로 고향 문림으로 돌아와 호연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 삼아 신선처럼 살았다고 한다. 퇴계가 <신재집(愼齋集)>을 교정하다가 문제가 있으면 제자를 시켜 ‘글 가운데 적당하지 않는 부분이 있거든 예안공(禮安公, 이요당을 말함)과 상의하여 처리하라’ 하였다고 한다. 조목, 이정, 황준량이 그가 교유했던 분들이다. 1564년(명종 19) 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50세 한창 원숙해 지는 나이였다.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왜란과 호란 시 분실하고 <호연정 12영> 등 시 15편 등 일부만 전한다.
호연정은 아쉽게도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인조 연간(1628~1623)에 중건하고 지금의 건물은 1711년(숙종 37)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식 팔작지붕이지만 다양한 양식이 혼합된 매우 독특한 정자다. 이처럼 기묘한 건축방식 때문에 조선시대 정자 중 특이한 작품의 하나로 꼽힌다. 자재를 씀에 있어도 일반적인 건물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가공하지 않고 생긴 그대로 사용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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