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당 박세순이 울릉도에서 300년생을 가져와서 심었다는 향나무
경수당내 연못가에 있는 누운 소나무
차나무
향나무 표석(경상북도 기념물 제 124호)
경수당 본체
경수당 전경
퇴계 친필인 경수당 현판
박세순(朴世淳)과 경수당 향나무
문, 전 대구시장으로부터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무안박씨 종택에 있는 오래된 향나무와 누워서 자라는 큰 소나무를 보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부랴부랴 찾았다가 낭패한 일이 있었다.
영덕군청의 홈페이지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고 찾아 간 곳은 같은 무안(武安) 박씨 후예이기는 하나 조선 중기 무신(武臣)이었던 박의장(朴毅長, 1555~1615)의 재사(齋舍)인 덕후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4호)로 나무 한 그루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창수면은 영덕에서도 오지(奧地)로 소문 난 곳인데 수리는 그 중에서도 더 깊은 산골이라 허탈감이 더 컸다. 그러나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임란 시 경주 판관이었던 박의장이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과 함께 왜의 수중에 넘어간 경주성을 탈환하고, 1593년 4월에는 군사 200명을 이끌고 대구의 파잠(巴岑)에서 왜병 2,000여 명을 만나 수십 명의 목을 베고, 수백 필의 말을 빼앗은 전공을 세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아니하였던 대구지역의 임란 전투상황을 더듬어 볼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었다. 이어 5월에는 울산에서 50여 명의 적의 목을 베고 경주부윤으로 승진했으며, 그 후에도 초산군(剿山郡), 안강, 양산, 언양, 기장전투 등에서 많은 전공을 세워 1599년 성주목사 겸 방어사, 1600년에는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다시 승진했다. 이 후 다섯 차례나 병마절도사를 역임했으며 재임 중에는 청렴하고 근신하기가 한결 같았다고 한다. 사후 호조판서에 추증 되고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선무일등공신에 녹훈된 훌륭한 분을 알게 되었다.
본관지인 전라도 무안은 연꽃축제로 유명한 곳이지만 서남해안의 작은 고을로 동해를 끼고 있는 영덕과는 끝과 끝이다. 그런데 그 분들의 후손이 수세기 전에 이곳에 터를 잡고 국난극복에 앞장서서 큰 공을 세운 사실이 무척 흥미롭다.
문 전 시장을 그 후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더니 이번에는 남양 홍씨 종가라고 했다. 합석했던 앞산공원관리사무소장을 지낸 이경우님이 그렇다면 한 번 가본 곳이라고 했다. 우리는 12월 5일로 날짜를 다시 잡아 이경우, 황병윤, 김병식, 김종학님 나 이렇게 5명이 함께 가기로 했다. 영덕군청 홈페이지를 다시 방문해 자료를 구했으나 허탕을 치고 다만 창수와 가까운 영해 원구리에 경수당종택에 큰 향나무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자료를 챙겨두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날씨가 봄날 같이 포근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겨울비가 내리고 바람조차 불었다. 다른 것은 문제가 없으나 잔뜩 찌푸린 날씨로 촬영이 어려울 것 같아 걱정되었다. 그러나 출발할 즈음부터 예보처럼 게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일행은 모두 푸른 대구 만들기에 일등공신들이다. 많은 이야기를 하며 도착한 곳은 영해 전통마을 괴시리였다. 마을을 한 바퀴 둘러보고 이어 목은 이색 선생 기념관으로 향했다. 포은이나, 도은, 야은은 경상도 출신임을 알았지만 목은조차도 경상도 태생임에 큰 자랑이라는 이야기를 하며 기념관을 나와 영해 장에서 별미(別味) 물곰국으로 점심을 먹었다.
이어 도착한 곳이 경수당 종택(慶壽堂 宗宅,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97호)이었다. 별채에 걸린 현판 경수당은 퇴계 이황(李滉)이 직접 쓴 수필(手筆)이라고 한다. 주로 주인이 책을 읽거나 외부 손님을 접대하는 곳인 것 같았다. 뒤 안에는 큰 향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124호)와 누운 소나무가 있는 것이 시장이 말하는 곳이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99칸으로 경수당 박세순이 32세 때인 1570년(선조 3)지었으며, 향나무 역시 울릉도에서 300년생을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그는 물려받은 재산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재(理財)에 밝아 당대 만석꾼이었다고 한다. 1597년(선조 30) 11월 경주 부윤인 조카 박의장이 명(明)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경주, 울산 등지에서 왜군과 격전을 계속할 때 오랜 전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어 군량미가 바닥나자 군인은 물론 여기저기 흩어져 돌아다니는 난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이 때 박세순은 보유하고 있던 양곡 800석을 조카 박의장에게 주어 700석은 군량미로 쓰고 나머지 100석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했다. 후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선조가 군량미 700석을 마련한 박의장에게 군마를 하사하며 치하했으나 그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공이 아니라, 숙부의 공이라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박세순은 전란이 끝난 후 선무원종공신2등에 녹훈되고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다.
현재의 경수당은 세순의 증손 박문약이 1668년(현종 9) 소실하고, 그 후 1773년(숙종 39) 새로 지은 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집은 모두 잿더미로 변했으나 현판(懸板)만은 온전하였다고 한다. 날씨가 개여 촬영에도 지장이 없었다. 보호수 안내판에는 수령이 700년이라고 하여 30년의 시차가 있으나 문중의 자료대로라면 올해로 꼭 739년이 된다. 주변에는 차나무도 있어 이곳이 바닷가로 대구 등 다른 영남내륙지역보다 따뜻한 곳임을 알 수 있다.
경수당가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이 어려웠던 임란 때 숙질(叔侄)이 함께 궐기한 자랑스러운 집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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