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인 이함(1554~1632)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가지가 잘려 미관상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후진양성을 위하여 1602년(선조 35)에 착공하여 1604년 (선조 37)에 완공했다는충효당 (중요민속자료 제168호)
조선 중기 영남지방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살림집인 충효당 안채 (중요민속자료 제168-1)
보호수안내표석
은행나무 줄기
재령이씨는 경주 이씨의 시조 표암공의 후예다. 그러나 소판(蘇判) 이거명(李居明)의 6세손이자 문하시중을 지낸 이우칭(李禹偁)이 황해도 재령을 녹읍으로 받아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지자 후손들이 본관지로 삼았다. 그 후 이소봉이 공민왕의 부마로 순성보조공신(純誠補祚功臣)과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면서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그러나 왕조 교체기 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아들 이일선(李日善)이 경남 밀양으로 낙남(落南)하면서 경상도에 뿌리를 내린다.
일선의 장자 이신(李申)이 출사해 지평(持平)을 역임했으나 1392년(공양왕 4) 정몽주 등 충신들이 피살될 때 귀양 간 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넷째 아들 이오(李午) 역시 급제는 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처가인 의령을 다니다가 함안 모곡에 정착했다.
재령이씨들이 영남에서 크게 족세를 떨친 것은 이오의 아들 이개지(李介智)가 진주의 벌족이자 성주목사를 지낸 하경리(河敬履)의 사위가 되면서 부와 명예를 축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개지 본인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맏아들 맹현(孟賢)과 둘째 아들 중현(仲賢)이 과거를 거쳐 주요 관직을 역임하여 다시 명문으로 부상했다. 특히 맹현은 1460년(세조 6)에 행한 춘당대시(春塘臺試)에 장원하고, 이어 1466년(세조 12) 세조가 현직 문관들을 상대로 실시한 발영시에도 합격해 세조의 총애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주선으로 당시 실권자였던 윤오(尹塢)의 사위가 되었다. 따라서 맹현은 함녕군(태종의 서자)의 외손이 되었다. 이러한 탄탄한 입지와 높은 학문, 이조참판과 나주목사 등 내, 외직을 두루 거치면서도 도덕적으로도 흠잡을 데가 없어 청백리에 뽑히면서 당대 명신이 되어 확실한 기반을 잡게 되었다. 그에게는 7남 2녀가 있었는데 제5자 종(瑽)이 진주파, 제6자 애(璦)가 영해파가 되는 이외에 나머지는 기호파로 활동하게 된다.
이애(李璦)가 영해 입향조가 된 것은 중부 이중현(李仲賢)이 이곳의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올 때 책실(冊室)로 함께 와 토박이인 진성백씨의 처녀와 혼인을 맺게 되고, 이 후 계속 이곳에 정착하여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 등 훗날 퇴계학파의 거유를 배출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는 1604년(선조 37)에 지은 고색창연한 건물 충효당(중요민속자료 제168호), 살림집(같은 민속자료 제 168호의 1), 사당( 같은 민속자료 제168의 2)이 있다.
원래 이애(1480~1561)가 지은 것인데 임란 후 약간 뒤쪽으로 옮겨 안채와 사랑채, 사당을 지어 조선시대 양반가옥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갈암(葛庵) 역시 이 집에서 태어났으며 <음식디미방>의 저자 정부인 안동장씨 역시 이집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그러나 영해파를 조선의 명문가(名門家)로 다시 발돋움하게 한 것은 이애의 손자 운악(雲嶽) 이함(李涵, 1554~1632)의 노력이 컸다. 1609년(광해군 1)대과에 급제할 만큼 실력도 당당했지만 마당 6,000석의 영남 5위의 부자이기도 했다. 임란 때에는 의병들에게 식량을 지원해 주어 나라 사랑에 앞장섰고, 거처를 잃고 떠돌아다니며 끼니를 잇지 못하는 백성들의 구흘(口吃)에도 힘썼다. 특히 흉년이 들어 양식이 모자랄 때 그는 하인들에게 도토리를 주어오게 하여 1년에 200여 가마니를 확보해 찾아온 베고픈 사람들을 위해 하루 300여 명에게 죽을 쑤어주었으며, 어떤 때는 700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때 부인인 진성이씨는 물론 셋째 며느리인 안동장씨(나중에 정부인으로 추증)마저 손톱에서 피가 났다고 한다. 이러한 이웃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풍습과 어진 마음으로 적선(積善)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란 후손들이 어찌 훌륭하게 되지 않겠는가? 따라서 손자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 1619~1672)은 외할아버지 장흥효로부터 학문을 배워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존재집> 등을 남기고 인산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아우 갈암 이현일(李玄逸, 1627~1704) 역시 형 존재와 함께 학문을 배우고 학행으로 천거 몇 번의 사양 끝에 마침내 출사하여 남인(南人)을 홀대하던 시대에 반대파의 모함으로 귀양살이를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이조(吏曹)판서에 올랐으며, <갈암집>을 남겼고 역시 인산서원에 제향(祭享)되었으며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고 퇴계학파의 계승자가 되었다.
공교로운 것은 영양 두들 마을로 분가(分家)한 며느리 안동장씨 역시 시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그곳에 도토리가 열리는 굴참나무를 심어 이웃 사랑을 실천했고, 운악은 충효당 앞에 은행나무 한 그루 심었다. 아마 공자(孔子)가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행단(杏壇)을 염두에 두고, 후손 중 누군가 대학자가 나올 것을 기대했을 것이고 실제 손자 대에 와서 그렇게 되었다. 따라서 이 집안은 나무를 통해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바라든 바를 얻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운악이 심은 나무는 어떤 연유로 가지가 잘렸는지 알 수 없지만 보기가 민망하고 수령(樹齡)이나 내력으로 보아 도(道)기념물로도 손색이 없을 터인데 기껏 군(郡)보호수로 지정된 것 역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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