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남아 있는 백송, 사진과 같이 벼랑위에 자라고 있어 산사태나 태풍으로 넘어질 우려가 있어 보호대책이 시급하다.
천연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되어보호되어 오다가 5~6년 전 고사했다. 이 사진은 고사되기 전의 백송
1520년 월연 이태가 낙향하여 지었다는 월연정(경남 문화재자료 제243호) 의 뒷모습
앞에서 바라본 월연정의 쌍경당(왼쪽)과 제헌(오른 쪽)
월연대의 중심공간 쌍경당
월영정의 뒷 모습
현판
제헌 현판
여주인 이태선생과 월연정 백송(白松)
밀양은 대구와 가까운 곳이지만 이 외로 자주 가보지 못했다. 최근 옛사람들의 수식목(手植木)을 찾아다니는 것을 취미를 하고부터는 몇 번 찾게 되었다. 명문 여주이씨들의 재사나 정자를 둘러보면 백송, 대왕송, 금송, 무환자나무 등 희귀한 조경수를 심어 놓은 곳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명문가는 높은 학문과 투철한 선비정신으로 국난극복과 지역사회 교화에 앞장서 온 가문을 일컫는다. 이런 기준이라면 여주이씨들은 조건을 갖추었음은 물론 고택 등에 나무 한 그루를 심는데도 고상한 선택을 했다.
본관지가 경기도 여주(麗州)이자 주로 개경과 한양에서 활동하던 여주 이문이 밀양에 뿌리를 내린 것은 1500년경 충순위 이사필(李師弼)이 연산군의 폭정을 피해 낙남(落南)하여 밀양 토호인 진사 유자공(柳子恭)의 사위가 되면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공은 원(遠)과 태(迨)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태(迨, 1483~1536)와 맏이 원의 아들 광진(光軫, 1513~1566)이 각기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함으로 입지를 굳혔다.
특히, 월연(月淵) 이태는 사간원 정언이나 사헌부 감찰, 홍문관 전한과 함경도 도사 삼척 부시 등 내, 외 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나 강직한 성품이 반대파의 모함을 받아 출사와 낙향을 거듭했다. 처음 낙향한 1520년(중종 6) 책을 읽을 만한 곳을 골라 쌍경당과 월연정(月淵亭, 경남 문화재자료 제243호)을 지으니 아름다운 밀양강 변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이다.
쌍경당을 남쪽에 월연정을 북쪽에 건립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일자(一字)형을 유지하여 어느 곳에서도 밀양강이 한눈에 조망되도록 배치했다. 또 쌍경당과 월연정 사이에 놓은 다리를 쌍청교(雙淸橋), 달빛이 비친 밤 산에서 계곡으로 흘러내려 오는 물을 맞이하는 곳이라는 영월간(迎月澗), 낚시를 놓는 수조대(垂釣臺), 족욕(足浴)을 즐기는 탁족암(濯足巖), 은행나무를 달리 부르는 행단(杏亶), 오죽을 심은 곳을 말하는 죽오(竹塢) 등 곳곳에 이름을 붙여 멋을 부렸다.
그는 낙향할 때마다 월연대에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들을 지도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뛰어났으며 저서로 『월연집』이 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공간도 왜란을 피해갈 수 없어 한 줌의 재로 변했다.
한동안 폐허로 남아있었던 것을 6대 주손 이지복(李之復, 1672~1759)이 1757년(영조 33) 중건했다. 이때 전라 우수사로 있던 종질 이홍(李弘, 1739~1809)이 지리산의 목재를 뗏목으로 운반해왔다고 한다. 1866년(고종 3)에 월연정을 복원함으로 당초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월연대는 소위 “월연 삼기(三奇)” 즉 백송, 오죽(烏竹), 희귀한 감나무 진시(珍柿)가 있을 만큼 다양한 나무들이 심겨져 있으나 그중에서 백송(白松)이 단연 돋보인다. 경상도는 어느 지역보다 종가나 정자문화가 발달 된 곳이다. 그러나 백송이 심어진 곳은 아직 보지 못 했다. 그러나 월연대는 달랐다. 500여 년 전에 심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백송은 대게의 경우 중국 사신으로 갔던 사람이 씨앗이나 묘목으로 가져와 심은 희귀한 나무다.
따라서 조선 시대에 심은 국내 16그루 모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7그루는 고사하고 현존하는 것은 5그루뿐이다. 월연정 백송 역시 월연이 처음 심은 백송은 1925년 홍수로 뿌리가 뽑혀 죽었으나 부근에 저절로 떨어진 씨앗에서 싹이 튼 두 그루가 용케도 살아남았다. 그중 200년생의 한그루가 천연기념물(제16호)로 지정되었으나 이 역시 5~6년 전 태풍으로 넘어져 고사하고 그보다 못한 한 그루가 월연대 북쪽 높은 벼랑에 서 있다. 조그마한 산사태나 태풍에도 넘어질 수 있어 보호 대책을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지금은 조경수로 많이 생산되어 전국 어느 곳에나 심지만 조선 시대에는 왕족이나 지체 높은 고관대작들이 거주하는 서울, 경기에 많이 심었고, 예외적으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아버지가 사신으로 갈 때 따라가 씨를 가져와 심은 충남 예산의 백송이 남쪽 한계선이었다.
그런데 500여 년 전 기후가 온화한 밀양에 심은 것은 이외이다. 다시 말해서 지리적으로 한반도 가장 남쪽에 심은 백송이다. 월연이 사신으로 간 사실이 없었던 점을 감안(勘案)하면 누군가로부터 얻어서 심었을 것이니 사교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남아있는 마지막 한 그루 역시 가장 남쪽에 씨가 자연상태에서 발아하여 자란 백송이라는 점에서 학술적인 연구가 필요하고, 올곧은 선비 월연의 살아있는 유물이자 500년 전 월연과 지금의 후손들을 이어주는 끈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단지 한 그루의 나무이기에 앞서 명승(제87호) 월연대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건축물의 개보수와 더불어 백송 보호에도 더 노력을 기울여 주었으면 한다. 백송은 껍질이 어릴 때는 녹색이었다가 자라면서 희게 되어 나중에는 하얗게 변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잎이 3개인 것이 2개인 소나무와 5개인 잣나무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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