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태허당 남붕선사와 표충비각 향나무

이정웅 2010. 1. 3. 16:33

 

 1742년 (영조 18) 사명당의 5대 법손 태허당 남붕선사가 표충비각을 짓고 기념으로 심었다는 향나무(경남 기년물 제 119호)

 높이 1.5미터 정도에서 똬리를 튼 모습으로 줄기가 굳어졌다.

 향나무 잎

 향나무와 표충비각

 임란 시 승군 지휘관으로 외교관으로 맹활약한 사명당 (영정, 양산통도사)

 표충비 (경남 유형문화재 제15호)

 표충비각 현판

 

태허당 남붕선사와 표충비각 향나무

주로 옛 사람들이 심은 나무를 찾아다니며 심은 이의 인물 됨됨과 심을 당시의 시대상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등을 소개하고 있는 나로서는 무안리향나무(경상남도 기념물 제119호)는 예외가 되었다. 왜냐하면 임란 시 한편으로는 승군(僧軍)의 지휘자로, 한편으로는 전란 수습의 외교관으로 큰 공을 새운 사명대사(四溟大師)를 기리는 표충비(表忠碑)를 세우고 그 일을 기념하기 위해서 나무를 심은 태허당(泰虛堂) 남붕선사가 어떤 스님인지을 알아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밀양시>에서 나온 자료는 물론 <표충사> 사적기를 들춰보아도 별다른 자료를 입수할 수 없었다.

남붕선사가 주관해서 세운 표충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5호)는 일명 ‘땀 흘리는 비’로도 잘 알려져 있다. 3,1운동 등 나라에 큰 변고가 있을 때 불가사의하게도 땀을 흘린다고 한다. 비문은 이의현(李宜顯)이 짓고, 글은 김진상(金鎭商)이, 전액(篆額) 은 유척기(兪拓基 )가 썼다. 이의현과 유척기는 영조 재위 중 정승을, 김진상은 판서를 지낸 명신(名臣)들이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대에 스님의 비문을 이런 이름 난 문신(文臣)들이 대거 참여하여 작성했다는 것은 스님이 특별히 존경 받을만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스님은 법명이 유정(惟政), 당호는 사명(四溟) 또는 송운(松雲)이었다. 1544년(중종 39)년 밀양에서 임수성(任守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으로 속가의 이름은 응규(應奎)였다. 15세에 어머니를. 이듬해에는 아버지를 여의는 불행을 겪는다. 그 뒤 김천 황악산 직지사에서 신묵(信黙)화상을 은사로 출가했다.

1561년(명종 16) 승과에 급제했다. 1575년(선조 8)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으로 들어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3년 동안 고된 수련을 마치고 금강산, 팔공산, 태백산, 청량산 등 명산대천을 주유하며 수행했다.

스님이 임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것은 1592년(선조 25) 그의 나이 49세로 금강산 유점사에 있을 때이다. 강원도 고성지역을 노략질하고 있던 왜장을 만나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타일렀다고 한다. 그는 의병을 모아 스승 서산대사 휘하로 갔다. 이 때 서산은 이미 승군총사령관으로 활동할 때였다. 그러나 연로하여 책임을 다할 수 없게 되자 사명(四溟)대사로 하여금 그 권한을 이어받도록 했다.

이듬해 지원군으로 온 명(明)나라 군사들과 함께 왜장 소서행장이 점령하고 있던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593년(선조 26) 서울의 삼각산 부근의 노원평(중랑천을 낀 마들평야)과 우관동(우이동) 전투에서 적 47명의 목을 베는 큰 전과를 올렸다. 선조는 대사에게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이어 절충장군 호분위상호군(虎賁偉上護軍)이라는 직책을 부여 승려에게는 파격적인 당상(堂上)직을 제수했다.

그 후 울산에 머물고 있는 가등청정 진중에 3차례나 방문 적진의 내부를 살펴보는 역량을 발휘했다. 그러나 임란 중 사명대사가 이루었던 가장 큰 업적은 일본에 잡혀간 무고한 우리백성 3,500명을 데리고 와서 가족의 품으로 되돌려 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1604년(선조 37) 그는 왕이 준 국서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풍신수길 사후 이제 막 정권을 잡은 덕천가강(德川家康)과 담판하여 마침내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되돌려 받아 귀국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귀국 후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녹훈 되고 가의대부(嘉義大夫) 봉해졌으며 3대에 걸쳐 벼슬이 추증되었다. 그 해 묘향산을 찾아 이미 입적한 서산대사의 부도 앞에 절하며 통곡했다. 1610년(광해 2)병이 깊어 가야산 해인사 홍제암에서 휴식을 취하든 던 중 입적하니 세수 67, 법랍 51이다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다.

남붕선사가 기념으로 심은 향나무는 높이 1.5미터 정도에서 가지를 수평으로 뻗었으며, 수관(樹冠) 폭은 10미터정도로 이중으로 지주를 받혀 보호하고 있었다. 크기는 안동 와룡면의 진성이씨 종택의 뚝향나무에 비할 바 못 되나 자라는 형태는 비슷하고 생육상태 역시 양호했다.

대구 출신의 나와 사명대사와의 만남은 조금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대구는 한 때 사과의 고장으로 이름이 났지만 약령시(藥令市)로도 유명한 곳이다. 영남의 중심도시로 북쪽으로는 태백산 서쪽으로는 지리산 등 우수한 약초 생산지가 있기 때문에 왕실에서 사용할 좋은 약재를 확보하기 위해 1658년(효종 9) 왕의 칙령으로 개설되었다.

이 전통은 350여년이 지난 지금도 면면이 이어져 내려와 한의원을 비롯해 250개의 한약관련 업소가 소위 ‘약전(藥廛)골목’을 형성하여 대구경제의 버팀목역할을 하고 있다.

그 때 즉 대구약령시 개설을 주도한 분이 바로 임의백(任義伯, 1605~1667)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사명대사와 같은 풍천임씨이다. 대사와 촌수로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대구 번영을 가져온 임감사를 현창(顯彰)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