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밀양인 소요당 박하담과 수야리 은행나무

이정웅 2010. 1. 17. 20:59

 

 소요당 박하담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경북 청도군 이서면 수야리 수령 500여년의 은행나무

 

 소요당 선생과 삼족당 김대유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암서원 내 선암서당

 

 소요당선생이 소요하던 소요대

 

 소요당 선생이 벼슬을 사양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만화정

 

 소요당 선생의 선조인 충숙공 박익과 임란 14의사를 기리는 용강서원

 

 임란 14의사의 묘정비각

 

  

 밀양인 소요당 박하담과 수야리 은행나무

 

청도가 물 맑고 경치 좋은 곳이라 전원주택지로 각광받고 있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좁은 행정구역(696.53Km2)에 비해 나무 문화재가 많은 데도 놀랐다. 우선 천연기념물만 해도 운문사 경내의 처진소나무(제180호), 매전면의 처진소나무(제295호), 각북면의 털왕버들(제298호), 대전리의 은행나무(제301호), 청도읍 원리의 보조국사가 심은 은행나무(제402호) 등 5그루이고, 경상북도기념물로는 지정된 나무로는 각북면 뚝향나무(제100호), 매전면 하평리 은행나무(제109호) 등 2그루다.

이는 대구광역시의 행정구역이 884.15Km2로 청도보다 더 넓은데도 천연기념물 1, 대구시기념물이 2그루뿐인 것을 비교해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단순 비교는 공식적인 것일 뿐 아직까지 천연기념물이나 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은 신안의 박란, 자계서원의 탁영 수식목 등 다수가 있다. 이들 나무까지 포함하면 격차가 더 벌어지는 점에서 청도의 또 다른 모습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씨없는 감 "청도반시"가 어떻게 해서 환경이 비슷한 다른 곳에서는 씨가 맺는지 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결과적으로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여도 결실이 잘 되는 품종이고, 이는 조선조 명종 때 평해군수를 역임했던 박호(朴虎,1512~1579 )가 임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친구가 귀국할 때 가져온 나무의 접순(接筍)을 무에 꽂아 가져와 재배하게 된 것이 일대에 확산된 사실을 알았다. 이 일을 하면서 알았던 또 하나의 새로운 사실은 이서면 소야리에 소요당 박하담(朴河淡,1479~1560)이 심은 은행나무가 수령이 500여 년이 넘었음에도 현재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소요당은 부사직을 지낸 아버지 승원(承元)과 어머니 진주하씨 사이에서1479년(성종 10)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그 읽기를 좋아하고 말이나 행동이 법도에 어긋남이 없어 주위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동창 김준손(金駿孫)이 그를 보고 공자(孔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자공(子貢)에 비유했다고 한다. 1516년(중종 11)생원 시에 합격하고 그 후 종중 조 현량과에 뽑혔으나 연로한 부모를 모시기 위해 출사를 단념했다.

1520년 42세나던 해 거처를 동창천부근의  신지리로 옮겨 눌연(訥淵) 위에 소요당을 짓고 이를 자호(自號)로 삼았으며 학문연구와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에 만족했다. 그가 쓴 소요당기에는  "화초를 보면 조물주가 만물의 생육하는 뜻을 알게 된다."는 부분이 있다. 이 말은 식물을 기르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풀은 비록 연약하지만한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후대를 잇게 하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늘에 자라든 바위 위에 자라든 자기가 서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에서 툭하면 남을 모함하고 질시하며 불평하는 인간이 배워야 할 지혜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높은 학문과 올바른 삶을 알게 된 관찰사가 "효를 다하고 육경(六經)을 깊이 연구한 선비이며 숨은 인재"라고 천거하여 조정에서 감역, 봉사, 사평 등의 직책을 주며 불렀으나 끝까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야기를 들은 남명 조식(曺植)이 나라에서 세 번이나 불렀는데 왜 출사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분수가 벼슬할 그릇이 못되고, 늙은 어버이를 두고 멀리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스스로 겸양해 했다고 한다. 삼족당 김대유(金大有,1479~1551)와 사창(社倉)을 설치해 고을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 많은 선비들이 처형되자 문집을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

1560년(명종 15) 돌아가시니 향연 82세였다. 1568년(선조 1) 사림이 주선하여 매전면 운수정에 삼족당과 박하담의 위패를 모시고 향현사(鄕賢祠)라고 하였으나 군수 황응규(黃應奎)가 두 분의 업적에 비해 대접이 너무 소홀하다 하여 금천면 신지로 옮겨 선암서원(仙巖書院)을 건립하고 소요 경비를 충당할 재원으로 공전(公田)을 지원하고 어성사(御城寺) 스님들이 관리하게 하였다.

소요당의 진면목은 손자와 증손자 대에 와서 그 빛을 더 발하게 되니 임진왜란 시 손자. 경신, 경인, 경전, 경윤, 경선 등 5명 증손자 찬, 우, 숙, 지남, 철남, 선, 인, 구 등 8명, 종증손자 근 등 1명  모두 14의사(義士)를 배출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청도는 영남대로의 통과지이기 때문에 임란의 피해가 어느 지역보다 컸었다. 이 때 부자, 형제, 숙질, 종형제가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게 큰 타격을 주어 그 중에서 12분이 선무원정공신 1.2.3등에 책봉되고, 1분은 병자호란 때 진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성장한 이서면 수야리에는 1505년(연산 11) 27세 때 그가 직접 심은 은행나무가 있다.

그가 은행나무와 구기자, 국화를 심고 지은 단행기(壇杏記)에 의하면  "내가 (나무를 심는 이유는)목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행단(공자가 제자를 가르친곳)의 은행나무이기에 사랑하는 바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미에 " 아아 내가 나무를 심으며 덕을 심는 것을 알게되고, 나무를 길러보고 사람을 기르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10년 계확에 그치리요, 장차 백세의 경륜을 삼을 것이니 은행나무여 내 마음을 알겠느냐  네가 있는 단을 잘 수호하라" 하였다. 이 나무의 무수한 가지처럼 후손들이 번창했다. 그러나 이런 큰 선비 소요당의 유적이 천연기념물로도 보호수로도 지정되지 못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