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광산인 필문 이선제선생과 쾌고정수

이정웅 2010. 2. 9. 07:10

 

 필문 이선제선생이 심었다는 수령 600여 년의 왕버들

 필문 이선제선생의 부조묘

 후손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북을 걸고 연회를 베풀었다고 하여 괘고정수라고도 한다.

 만산 마을 입구

 만산마을

 필문 이선생 신도비

 광이가 배출한 선비들의 비

 

광산인 필문 이선제선생과 쾌고정수

광주광역시에는 칠석동의 은행나무(기념물 제10호), 등 5그루의 노거수가 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내가 찾고자 하는 심은 이가 분명한 나무는 2 그루뿐이었다. 공교로운 것은 두 그루 다 남구(南區)에 있으며, 심은 시기도 비슷하고, 심은 이들의 본관지가 광산(光山)이나 모두 신라 왕족 김씨의 후예라는 점이었다.

칠석동의 은행나무를 심은 부용(芙蓉) 김문발(金文發, 1358~1418)은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만산마을의 괘고정수를 심은 필문(畢門) 이선제(李先齊, 1390~1454)는 후고구려의 왕 궁예의 후손이다.

광산이씨의 시조(始祖)는 광산군(光山君) 이종금(李宗金)이다. 원래는 성은 김 이름은 일형이었다고 한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2차 칩임 때 강감찬 장군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1018년(현종 9) 3차 침입 때에는 인근 주(州)·군(郡)의 군사들을 모아 강화성(江華城)을 지켜 나라의 귀중한 재화를 지켜냈다고 한다. 이러한 전공으로 1032년(덕종 2)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지면서 이종금(李宗金)으로, 성(姓)과 이름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받들고 광산군(光山郡) 일대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지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부천족보도서관이나 기타, 다른 자료에 의하면 신라 제47대 헌안왕의 후손인 이정(김정)을 시조로, 그의 8세손 이순백(李珣白)을 득관조(得貫祖)라고도 한다. 순백은 고려 충숙왕 때 상서좌복야로 왕을 호종 은청광록대부에 오르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씨를 하사 받았다고 한다)

 

만산마을 초입의 괘고정수(掛鼓亭樹)는 선초의 문신 필문 이선제(李先齊)가 심었다고 한다. 필문은 나무를 심으면서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이 쇠락할 것이니 관리를 잘하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고 한다. 이후 필문의 후손들은 과거에 급제를 하면 이 나무에 급제자의 이름과 북을 걸어놓고 두드리면서 잔치를 벌였다. 이선제를 필두로 그의 두 아들인 이시원과 이형원이 과거에 합격했고, 이형원의 아들 이달손, 이달손의 아들 이공인, 이공인의 아들 이중호, 이중호의 아들 이발과 이길이 대를 이어 합격하면서 가문의 영광을 알리는 북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그는 양촌 권근에게 학문을 배워 1419년(세종 1) 문과에 급제했다. 1423년(세종 5) 사관으로 앞서 정도전 등이 편찬한 <고려사>를 개수할 때 당시 이색·이인복이 지은 <금경록(金鏡錄)>에 의거함으로서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고 지적 그 실상을 직서(直敍)하도록 했다. 1431년 (세종 13) 집현전부교리 이어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태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그 뒤 형조참의, 첨지중추원사, 병조참의를 거쳐 1444년(세종 26)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 1446년(세종 28)예조참의를 거쳐 한때 삼의사제조(三醫司提調)를 지냈다. 이어 호조참판에 오르고 1448년(세종 30)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 해 <고려사> 개찬을 감장(監掌)하고, 문종이 즉위하자 예문관 제학이 되었다. 이 때 서북지방의 군제 정비, 야인의 객관 별치(別置), 어염세(魚鹽稅)를 확보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히 할 것 등을 건의했다. 단종이 즉위한 뒤 경창부 윤(慶昌府 尹)이 되어서는 전염병 방제에 노력하다가 1454년(단종 2)에 돌아가셨다.

필문은 고려사 개수며, 국방력 강화, 단군성전 건립 등 나라 일에도 많은 노력을 했지만 애향심도 남달랐다. 1430년(세종 12) 광주가 목(牧)에서 무진군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는다. 만호를 지낸 노흥준이 관기(官妓)를 차지하려고 목사(牧使)를 구타하여 죽은 일이 벌어지자 강등시킨 것이다. 후에 필문이 고을의 원로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다시 목(牧)으로 환원시켰다. 또한 필문정사를 지어 후진향성에 힘썼을 뿐 아니라, 향약을 실시 고을의 풍속을 순화하고 자치역량을 배양시켰다. 뿐만 아니라, 현재 광주우체국 자리에 희경루(喜慶樓)를 짓는데도 기여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이러한 필암의 애향심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조선대학교 앞길을 ‘필문로’ 명명하였다. 그가 심었다는 괘고정수의 정확한 나무 이름은 왕버들이다. 후손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가지에 북(鼓)을 걸고(掛) 축하연을 베풀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나무는 한 때 죽었다가 되살아났다고 한다. 1589년(선조 22) 동인과 서인의 세력 다툼으로 빚어진 기축옥사에 필암의 5세손이자 당시 사림을 주도하든 동암 이발(李潑,1544~1589)과 남계 이길(李洁, 1547~1589)형제가 연루되어 본인은 물론 노모와 어린 아들까지 죽임을 당했는데 그때부터 잎이 마르고 나무가 죽었다고 한다. 억울함과 원한이 괘고정수에까지 미쳤던 것 같다.

이 옥사는 ‘정여립(鄭汝立)모반사건’이라고도 한다. 송강 정철(1536~1593) 이 주도하여 동인계열의 영호남의 엘리트 1,000여 명에게 화를 입혔다. 이 여파로 희생이 가장 컸던 집안은 광이(光李)였다. 소위 역적으로 몰려 뿔뿔이 흩어지고 숨어서 살아야 했다. 뒷날 이들 형제의 억울함이 밝혀지자 나무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수령 600여 년, 수고 15미터, 가슴높이 직경 1.7미터인 괘고정수의 현재 생육상태는 매우 좋다. 광주시가 보호하고 있어서도 그렇지만 후손들이 정성스럽게 보살피기 때문이다. 제월산 양지바른 곳에는 필문선생의 부조묘(不祧廟, 공훈이 있는 사람으로서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허락한 신위 )가 있다. 먼 길을 가서 부조묘와 나무를 보고 돌아서면서 잠시 상념에 잠겼다.

광이는 이선제를 비롯한 5현을 호남에서, 육일헌 이홍량(1531~1592) 3형제와 그들의 아들 9형제 즉 ‘3세9현’을 영남에서 배출하여 명문으로 발돋움했다. 멸문에 가까운 화를 입고도 이렇게 거뜬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괘고정수의 깊고 넓게 뻗은 뿌리처럼 끈질긴 생명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