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밀양인 농암 박란(朴鸞)과 칠곡의 은행나무

이정웅 2010. 1. 13. 14:21

 

 밀양인 농암 박란(1494~1557)이 심은 은행나무 생육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느티나무, 뿌리부분을 마을안길 포장공사 시 시멘트로 덮어 생육상태가 매우 불량하다.

 밀양인 박계은이  1471년(성종 2)에 터를 잡은 신안마을 , 멀리 보이는 산이 자양산이다. 

 신안리 마을 앞 숲

 박란을 기리는 훈령서원

 

청도군 이서면 신촌리는 밀양박씨 밀직부사공파의 집성촌이라는 것 이외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마을과 주변을 중국의 성리학자 주희(朱熹, 1130~1200)가 살고 있던 곳과 똑 같이 가꾸고 삶 자체도 성리학에 바탕을 두고자 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유별나게 나무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본관이 밀양인 그들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1471년(성종 2)이라고 한다. 화은 박계은(朴繼恩)이 청도 한재에서 이곳으로 옮겨 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어버이를 지극 정성으로 섬겼고, 향학열 또한 남달라 경서(經書)를 스스로 익혔을 뿐 만 아니라, 학문이 높은 사람이 있으면 먼 길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 배웠다고 한다. 1468년(세조 18)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훈령산(薰嶺山) 아래 서당을 열어 글을 가르치니 그의 높은 학문과 훌륭한 인품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영남의 많은 선비들이 교유하고자했다고 한다.

그는 맹문(孟文)과 중문(仲文) 두 아들을 두었는데 각기 순천부 교수(敎授)와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냈다.

그들이 명문 밀양박씨 중에서도 특별히 새울박씨로, 불러지고, 마을을 주자(朱子)가 살던 곳과 같이 뒷산을 자양산(紫陽山)으로, 마을 이름을 신안(新安)으로 불러지게 된 것은 화은의 손자 대에 와서 이룩된 명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맹문의 두 아들 린(麟)과 란(鸞)이 각기 청도 교수와 진사로 입신하고, 중문의 아들 호(虎)가 대과에 급제해 평해군수를 역임하면서 문명을 떨쳤기 때문이다. 특히, 호(虎)는 임기를 마치고 올 때 씨 없는 감나무의 접순(接筍)을 가지고와 오늘날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은 청도반시를 있게 했고, 란(鸞)은 같은 면내 칠곡으로 이거하면서 심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아직도 건재해 보는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박란은 아호가 농암(聾巖)으로 1494년(성종 25)에 태어나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새울과 가까운 칠곡에 정사(精舍)를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오직 학문 연마와 청도 문풍 진작(振作)을 위해 힘썼다. 퇴계나 남명과도 교유했지만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 1479~1551)와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그로 말하면 사초(史草)가 발단이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史禍)로 일컬어지는 무오사화(戊午士禍)의 희생자인 탁영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의 조카다.

작은 아버지 탁영이 간신들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고 수많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혹은 유배될 때에 자신도 아버지 김준손과 함께 호남으로 귀양가야했다. 이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고 1519년(중중 14)에는 조광조가 인재발굴의 새로운 시도로 실시한 현량과(賢良科)에 급제 정언, 칠원현감 등을 역임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현량과가 혁파되면서 낙향하여 은거한 분이다.

탁영의 죽음은 훈구파와 척신이 실권을 잡고 있는 조정에 학문을 통해 출사해 뜻을 펼쳐보겠다고 공부하고 있든 많은 선비들에게 큰 좌절감을 안겨주었지만 그와 함께 화를 당해 평안도 벽계로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시 희생된 오졸재 박한주 등 걸출한 선비 두 분을 배출한 청도사람들의 슬픔은 더 컸을 것이다. 특히 탁영이 태어난 서원리와 불과 10여 리 떨어진 새울에서 태어났고, 올곧은 선비로 사림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탁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조카이자 학문이 높았던 삼족당에 대한 존경심도 컸을 것이다.

당시 조선의 군, 현에는 수령(守令)이 지역을 다스릴 때에 일러날 수 있는 시행착오를 미연에 방지하고, 현리(縣吏)들이 저지르는 부정을 막으며, 고을의 미풍양속을 권장하고, 수령의 자문 역할을 하기 위해 지역의 대표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유향소(留鄕所)가 운영되었다. 청도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이 모여 회합할 건물 향로당(鄕老堂)을 지을 때 농암은 향장(鄕長)으로 있으며 기문(記文)과 구성원들이 지켜야할 향헌(鄕憲)과 향규(鄕規)를 직접 썼다. 이때가 그의 나이 48세 1541년(중종 36)이었다.

무오사화로 탁영선생이 희생된 지 43년만의 일이다. 그는 기문에서 ‘우리 고을이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명성과 문물이 갖추어진 곳으로 대대로 문무(文武) 재사(才士)가 적지 않았다.’라고 하여 향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했다. 그의 이런 진솔한 생각은 사화의 여파로 날로 쇠퇴해가는 문풍을 되살리고자 하는 염원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1557년(명종 12)돌아가시니 향년 64세, 훈령서원에 배향되었다.

선생이 심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를 보러 가는 길에는 방손(傍孫) 박희춘(朴熙椿 전 경성대학 교수)님이 동행했다. 그러나 전자는 생육상태가 매우 양호했으나, 후자는 마을길을 포장하면서 뿌리부분을 시멘트로 덮어 고사(枯死) 직전에 있었고 보호수로도 관리되지 않는 점이 너무 아쉬웠다. 선생이 지역사회발전을 위해 힘쓴 노력에 비하면 대접이 너무 소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