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광산인 부용 김문발과 칠석동 은행나무

이정웅 2010. 2. 5. 06:03

 

 

조선조 초 부용 광산인 김문발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수령 600여 년의 은행나무 

 

연꽃을 감상하고 향약을 논의하던 부용정 

 

부용정 현판 

칠석고싸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 체험영상관 

은행나무의 금줄 

칠석마을 전경 

 

 

광산인 부용 김문발과 칠석동 은행나무

대구에서 08:00분에 출발한 버스는 정확히 11시 30분에 광주터미널에 나를 내려 놓았다. 우선 일정을 확정짓기 위해 관광안내소를 찾아 차편부터 확인했다. 대중교통수단을 알아보았더니 택시를 이용하는 편이 오히려 더 편리할 것이라고 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지하식당가로 내려가 매생이정식을 주문했다. 대구에서 딱 한번 먹어 보고 반해 미식(美食)의 본고장인 광주에서는 또 어떤 맛일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식탁에 오른 반찬 역시 하나 같이 깔끔했다. 뜨거우니 덜어 먹으라며 빈 그릇까지 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었다. 터미널 부근은 주로 뜨내기손님들이 이용하기 때문에 성의 없게 밥상을 차리거나 불친절하기가 일쑤인 것을 경험한 나로서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이번 답사가 즐거울 것이라는 예감이 미리부터 들었다. 남구 칠석동은 시가지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있었다. 이 먼 곳을 찾아온 이유는 여말(麗末)조선 초 문무를 겸비한 광산인 부용(芙蓉) 김문발(1338~1418)선생이 심었다는 수령 600여 년, 수고 26미터, 흉고 둘레 13미터의 거대한 은행나무(광주시 기념물 제10호)를 보기 위해서였다.

나무를 심은 김문발은 1386년(고려 우왕 12) 유일로 천거되어 남원, 보성 등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만호가 되고, 이어 1394년(태조 3)수군첨절제사 김빈길, 등과 함께 왜구의 배 3척을 포획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활, 화살, 은제그릇 등을 하사받았다.

1406년(태종 6)에는 전라도수군단무사(全羅道水軍團撫使)로 남해안일대에서 왜선 1척을 포획하는 전공을 세우고 경기수군도절제사, 충청전라도수군도체찰추포사(忠淸全羅道水軍都體察追捕使)을 역임하였으며 1411년(태종 11)충청도수군절제사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벼슬을 사양했다. 이듬해 전라도수군절제사가 되고 1418년(태종 18)에는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사람됨이 매우 공손하고 겸손하였으며 특히 왜구토벌에 공이 많았다.

그가 은행나무를 심은 동기는 마을이 소가 누운 형상이기 때문에 농민들의 벗인 소가 달아나지 않도록 고삐를 매어두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는 또한 남전향약을 본 따 칠석동향약을 실시할 정도로 향촌사회 교회에도 힘썼다.

광주의 별호(別號)인 광산을 본관지로 하는 광산김씨는 고려 초에 이미 많은 인재를 배출한 명문이다. 시조(始祖)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제45대 신무왕의 셋째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으로부터 광산부원군으로 봉해진 분이다. 그는 신라가 망할 것을 미리 알고 경주를 떠나 이곳 무진주 서일동(지금의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은거함으로 후손들이 본관지로 삼았다. 마을 이름 평장은 8명의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함에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무진주는 아버지 신무왕(神武王, 재위기간 839~839)에게는 매우 특별한 곳이다. 신무왕의 이름은 우징으로 김씨다. 아버지 균정과 어머니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812년(헌덕왕 4) 김헌창이 난을 일으키자 아버지와 함께 이를 평정하여 큰 공을 세워 828년(흥덕왕 3) 시중으로 승진했다. 834년(흥덕왕 9) 아버지가 상대등에 임명되자 그는 시중자리에서 물러나야했다.

제42대 흥덕왕이 죽자 왕의 4촌 동생인 균정과 5촌 조카인 제륭이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여 균정이 죽고 제륭이 승리하니 이가 곧 제43대 희강왕(재위 836~838)이다. 이 싸움에서 아버지를 잃은 김우징은 청해진에 있는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한다. 그러나 희강왕 역시 수하인 김명이 난을 일으키자 자살한다. 뒤이어 김명이 왕위에 오르니 제44대 민애왕(재위 838~839)이다.

해상 왕 장보고로부터 5,000명의 군사를 지원 받은 김우징은 838년(민애왕 1) 12월 신라로 진격한다. 이 소식을 들은 민애왕이 김민주 등 군사를 보내 무진주의 철야현(지금의 나주부근)에서 토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관군이 참패를 당한다. 승기를 잡은 김우징은 계속 서라벌로 향해 달구벌(지금의 대구)에서 민애왕이 보낸 관군을 다시 대파한다. 비보를 접한 민애왕이 도망을 가려했으니 이미 서라벌을 점령한 김우징군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이에 김우징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신라 제45대 신무왕이다. 따라서 시조에게 있어 무진주는 아버지가 일으킨 군사와 민애왕이 보낸 군사가 벌인 싸움에서 승리한 영광스러운 곳으로 묵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광산김씨는 265명의 문과급제자, 정승 5명, 대제학 7명, 청백리 4명을 배출하는 명문으로 발돋움했다.

남구 찰석동은 이런 유풍(遺風)이 면면이 이어오고 있어 그런지 고싸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33호)가 전승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최근 고싸움놀이 테마파크를 조성하면서 은행나무 뿌리부분에 둑을 쌓아 생장에 지장이 없을지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