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 한용운 스님의 회갑을 맞아 승려이자 제헌국회의원이었던 최범술, 소설가 김동리선생의 형 김범부, 승려이자 문교부장괸이었던 김법린 등이 함께 심었다는 황금편백나무
가장 자리가 황금색인 황금편백나무 잎
천년고찰 다솔사의 적멸보궁
부처님의 진신사리 탑
대양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경내에 있는 녹차 밭
시인이자 승려, 독립운동가로 다양한 삶을 살다가신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스님
대구에서 활동하는 문인(文人)들의 모임인 대구문인협회 산길모임의 김찬일회장이 협회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모임을 결성하고 첫 대상지로 경남 사천군에 있는 봉명산 다솔사(多率寺)를 가기로 했으니 희망자는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남들처럼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등단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을 직업적으로 쓰는 전업 작가도 아닌 나로서는 회원이기는 하나 이런 모임에 자주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은 달랐다. 경관이 수려하다는 말은 그리 반가운 이야기가 아니나, 그 곳에 수도했던 만해 한용운(1879~1944)스님이 회갑(回甲)을 맞아 심은 황금편백(黃金扁柏)나무가 있다고 한 것에 마음이 솔깃해졌다.
스님과 인연을 맺은 것은 어느 소녀로부터 비롯된다. 고교 시절 나는 문학 소년으로 교내외 잡지에 글을 발표하면서 몇 명의 또래들과 어울려 재미있게 보내다가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 때 그녀의 집은 시내에 있었지만 나는 인근 군에서 소위 유학을 했기 때문에 졸업 후에는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그녀는 내게 맨 첫 장에 ‘님의 침묵’을 써 붙인 노트 한 권을 선물했다. 당시 나는 그녀가 좋아 하는 시(詩)이려니 생각했다. 40여 년도 더 지난 지금 돌아보면 어쩌면 연정의 표시이자 시의 내용처럼 영영 만나지 못할 것을 미리 알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연유로 한용운은 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시인이었다. 더구나 산림공무원으로 한 평생을 보내고 은퇴한 지금은 옛 사람들이 심은 나무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 나로서는 님이 심은 나무가 있다는 사실에 눈이 번쩍 뜨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은 1879년(고종 16) 충남 홍성 출신으로 농민운동과 의병활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격동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18세 때인 1896년(또는 1897) 고향을 떠나 강원도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05년(고종 42) 전영제스님으로부터 마침내 계(戒)를 받고 승려의 길로 들어섰다. 이 후 1908년(순종 2)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경험이 그의 사상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1910년 마침내 500여년의 조선왕조는 막을 내리고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듬해인 1911년 송광사로 온 그는 박한영, 진진웅, 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를 통합하려는 이회광 등의 친일행위를 규탄, 저지하고 이어 1917년 조선불교회장에 취임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나, 곧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출옥 후 오히려 그의 독립운동은 더 활발해져 인재양성에 필요한 대학 설립과 물산장려운동을 위해 뛰었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장 1927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과 경성(서울)지회장, 1931년 잡지<불교>를 인수하여 사장(社長)이 되었다. 또한 김법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黨首)가 되었다. 1940년 창씨계몽반대운동에 참여하고, 1943년 조선인학병출정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후에도 일제의 강압통치를 반대해 총독부와 마주하기 싫다며 문이 북쪽으로 난 성북동 집에 살다가 1944년 광복을 1년 여 앞두고 66세 나이로 돌아가셨다.
그는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불교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님의 침묵 등 시, 시조, 소설 등 문학가로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솔직히 다솔사는 언젠가 가보고 싶은 절이었다. 유서 깊은 절이기도 하지만, 신라불교를 반석에 올린 자장율사와 화엄종조인 의상대사, 풍수지리설의 비조 도선국사, 고려 말의 이름 난 스님 나옹화상이 불법을 펼친 곳이자 특히 만해스님이 이곳에서 독립선언문을 기초했으며, 소설가 김동리가 그의 대표작의 하나인 등신불(等身佛)을, 한국전통다도의 새 문화를 열었다는 최범술선생이 <한국의 다도>를 집필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찰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여느 사람들과 같이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친견하는 것으로 참배를 시작했지만 내 마음은 벌써 황금편백나무에 가 있었다.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최범술, 문교부장관을 지낸 김법린, 동양철학자이자 김동리선생의 형인 김법부 등 당대의 명사들이 스님의 회갑을 맞아 기념으로 심었다면 절의 한 가운데나, 대중들이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심었을 것이라는 내 짐작은 빗나갔다. 대웅전 앞마당 오른쪽 옆으로 난 작을 길을 통해나가니 대양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동쪽 비탈진 곳에 황금편백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만해스님이 회갑 때 심었다는 안내판은 없었다. 편백나무를 개량해 잎 가장자리에 황금빛이 들게 한 것이다. 난대지방이 자생지인 만큼 기후에 잘 맞아 그런지 마음껏 자란 것 같다. 절 내를 찬찬히 살펴보니 그곳 말고도 봉명산을 오르는 등산로 쪽 밭둑에도 몇 그루 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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