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이야기

태암 문홍도(文弘道)와 합천 세미실 은행나무

이정웅 2009. 11. 22. 09:42

 

 조선 중기 다양한 삶을 살다간 태암 문홍도가 심었다는 합천군 유곡면 세미실 앞 은행나무

 

 

 

높이 2미터 정도에서 가지가 9개로 뻗어 여느 은행나무보다 수형이 아름답다 .

 

 

 

 

 합천군수가 설치한 표석 그러나 수령이 잘 못된 것 같다.

 

우연한 기회에 합천군 유곡면 본천리 세미실에 조선 중기 명 어사(御使)로 활동하고, 임란 때에는 정인홍과 함께 구국운동에 앞장섰던 선비 태암 (泰巖)문홍도(文弘道, 1553~?)가 심은 은행나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늘 그렇지만 옛 사람들이 심은 수식목이 있다는 사실은 나를 흥분시킨다. 우선 군(郡) 산림과에 전화를 걸었다.

나는 대구 사람으로 오랜 기간 산림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지금은 노거수를 찾아다니기를 좋아해 세미실에 있는 보호수 심은 사람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으니 관리하는 분의 이름과 연락처를 좀 알고 싶다고 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이 담당자가 없으니 나중에 다시 전화하던지 아니면 면사무소에 알아보라고 했다. 현직 공무원의 불성실한 태도에 대해 늘 못마땅해 하고 있는 나는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보관하고 있는 대장만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출장 간 직원이 언제 올지도 모르니 오히려 내 전화번호를 메모해 두었다가 담당자가 오면 가르쳐 달라고 좀 언짢은 투로 말했다. 몇 시간 후에 답이 올지 아니면 그냥 지나치고 아예 안 올지를 체크하기 위해 전화 건 시각을 기록해 두었다. 정확히 25분 후에 답이 왔다. 이 정도면 합천군 공무원의 친절도가 괜찮다고 생각하며 받아 적었다. 최근 각 시군의 단체장들은 자기 군을 홍보하기 위해 여념이 없다. 영상테마파크를 만들어 KBS의 ‘서울 1945년’과 MBC의 ‘에덴의 동쪽’ 등을 유치한 합천군은 이런 점에서 다른 군에 비해 더 열심인 것 같다. 그러나 일부 공무원들은 이러한 단체장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불친절하다. 이런 점에서 합천군 공무원은 잘 훈련된 것 같아 다행이다.

11월 하순 세미실을 찾았다. 합천읍으로 갔으면 더 빨리 현장을 찾았을 것인데 초행이라 쌍책면으로 진입해 묻고 또 물어 도착했다. 좀 일찍 알았다면 단풍이 노랗게 물들었을 때 찾았을 터인데 잎이 다 떨어지고 가지만 앙상하게 초겨울 추위를 맞고 있었다. 2미터 정도 높이에서 9개의 가지가 뻗어 수형이 참 아름다웠다. 보호수라는 합군군수의 표지석이 설치되어있었으나 너무 나무 뿌리부분 가까이까지 포장하여 언제까지 나무가 잘 자랄지 걱정되었다.

직계 후손이자 관리지로 지정된 분은 노환(老患)이라 아예 만나보지도 못하고, 방계 후손 중 교장을 역임한 분을 소개해 주었으나 출타 중이어서 그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아무 것도 없었다. 특히 놀라운 점은 각기 어머님과 부인이 집을 지키고 있어 아드님과 남편의 전화번호를 물었으나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낯선 사람이기에 무슨 잘못이라도 일어날까 걱정해서 그런 것 같다. 이런 불신풍조가 농촌 전반에 퍼져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를 심은 테암 문홍도는 본관이 남평으로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극(剋)이다. 내암 정인홍의 문인으로 1585년(선조 18)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8년(선조 21년) 3년마다 한 번씩 치러지는 식년시에 합격해 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의 하나인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1593년(선조 26)에는 정언(正言)으로 영전하고 이어 지평(持平), 세자시강원사서, 주로 훌륭한 가문 출신으로 능력 있는 관료만 선발되는 홍문록에 선정되어 홍문관수찬을 지냈다. 그 후 평안도 어사(御使), 수원부사, 의정부 사인(舍人)으로도 활동했다.

정언으로 있을 때 사간 김신국, 헌납 이이첨, 정언 박승업과 더불어 송화현감 이귀와 경상우병사 박대수 등 부정 공무원을 탄핵 체직시키고, 좌승지 민몽룡, 양주목사 허흔을 파직시켰다. 임란이 일어나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같이 위태로울 때 스승 정인홍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는 박이장과 함께 군량(軍糧) 조달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스승 정인홍과 대립관계에 있던 남인의 영수 유성룡이 임란 중 왜와 화의를 주장했다고 탄핵할 때 앞장서고 그 후 북인이 정권을 잡았을 때 실력자가 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그 역시 더 이상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이었기에 나라를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시대상황이 그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세미실은 여느 농촌처럼 조용했다. 그러나 표석에 나무의 수령이 460년이라고 적은 것은 잘 못된 것 같다. 심은 이의 출생년도와 활동 시기 등을 감안 할 때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사소하지만 이런 실수는 하지 아니하여야 한다.

문홍도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리는 유래 비(碑)를 나무 앞에 세웠으면 한다. 문중(門中) 관계자를 통해 실기나 행장(行狀)을 입수 선생에 대해 보다 많은 정보를 알았으면 했으나 그럴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러나 신라와 백제가 치열하게 싸웠던 대야성을 보고 함벽루에 올라 맑고 푸른 황강을 바라보면서 합천이 비록 작은 고을이지만 참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