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 넘어간 뒤 제사 끊기고 신위<神位>도 사라져"
대구시 동구 도동의 천연기념물 1호 측백나무 숲을 따라 10여분 가면 계곡 안에 널찍한 마을이 나타난다. 산기슭에 자리잡은 10여채 집 중 기와집 3채로 이뤄진 고가(古家)가 눈에 띈다.이 집이 조선의 고종과 순종 황제를 모신 이제묘(二帝廟)다. 서돈수(77)씨는 이제묘를 40여년간 지켜왔다. 사당을 만든 그의 처조부 최상길이 1967년 숨지며 "임금님 모시는 일을 맡아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최상길은 고종 때 병조참판(국방차관)을 지낸 최병술의 손자로 유학자였다. 최씨는 광무제(光武帝) 고종 사후 경북 상주에서 임금이 계시던 서울을 향해 망곡단(望哭壇)을 세우고 삼년상을 치렀다.
- ▲ 고종황제와 순종황제를 모신 이제묘(二帝廟)를 40여년 지켜온 서돈수씨가 황폐해져 가는 이제묘를 안타깝게 가리키고 있다. / 대구=이재우 기자 jw-lee@chosun.com
이제묘로 기자를 안내하던 서씨의 노안(老顔)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몇년 전 처가집에서 사업 실패로 이 집이 경매로 넘어갔었어요. 그 뒤 누구도 돌보지않아 매년 지내던 향사도 끊어지고…."
사당 안에 있던 고종과 순종의 신위(神位)는 모두 치워졌고 충효를 강의하던 강례당(講禮堂)은 텅 빈 집처럼 변했다. '숭의문'과 '이제묘'란 현판만 임금을 모시던 사당이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1926년부터 대한제국 황제 사당을 지켜온 최씨 일가는 숱한 수난을 겪었다. 광희묘를 모시던 최씨는 일제때 20여 차례나 일본 경찰에 붙들려 고문당했다. "왜 제사를 지내냐" "독립운동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일본도 임금을 섬기는데 내가 내 임금을 섬기는 게 잘못됐냐"며 버텼다. 최씨 맏아들은 광희묘를 만들다 과로로 숨졌고 둘째 아들은 6·25 때 곡식을 강탈하던 인민군에게 "임금님께 바치는 곡식을 가져가면 안 된다"고 맞서다 총에 맞아 숨졌다.
제향 지내는 것도 정성을 기울였다. 최씨는 제향을 지내는 날이면 잡귀를 쫓는다며 마을 입구부터 이제묘까지 수백m에 황토 흙을 새로 깔곤 했다. 제향에는 20관 이상 통돼지와 사슴고기 말린 것, 백설기가 시루째 올려졌다. 황제 시종관이나 홍문관 관리를 지낸 이들도 서울에서 내려와 초혼관으로 참여했다. 영남 일대의 유림 20~30명도 참석했다. 최씨가 일제 때도 일본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고 꼬박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이 사연들이 최씨가 남긴 120페이지짜리 책에 기록돼 있다. 서돈수씨 부인 최외순(76)씨는 "할아버지가 일부러 유학자 집안에서 남편을 맞게 했어요. 남편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도 유언을 지키려고 더욱 애썼지요"라고 했다. 제사상 음식도 예전과 다름없이 하려고 어느 하나 빠뜨리지 않았다고 한다. 최씨 가족들은 일제가 패망하고 대한민국이 들어선 뒤에도 스스로를 '대한제국 유민(遺民)'이라며 살았다.
일제 때 창씨개명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상투를 틀고 살았던 최씨는 묘비명에도 '대한 유민'으로 되어 있다. 서씨에게는 올해가 2010년이나 단기 4343년이 아니다. 융희 104년일 뿐이다. 제향 때도 이들은 "유세차 융희 기원후 몇년"이라며 고유문을 읽곤 한다. 이 시대 마지막 남은 대한제국 사람들인 것이다. 서씨는 이제묘를 나온 뒤 인근의 대구 불로동에 4대째 가업인 서당을 차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서씨는 "제향에 참석하던 유학자들도 대부분 돌아가셨어요. 이제묘 제사가 바로 유림들의 독립운동이었다는 사실이 영원히 기억됐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서울교대 안천 교수는 "이제묘는 보존해야 할 근대 유적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