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원단상

천안함이 진보에 던지는 메시지

이정웅 2010. 5. 27. 21:01

 천안함이 진보에 던지는 메시지
 
 
 
소련의 실상에 대한 지식인들의 무지는 지금 돌이켜봐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수많은 인민이 굶어 죽고 조직적 국가폭력이 자행되고 있었는데도 그들은 소련 칭찬에 열을 올렸다. 러시아 역사상 최악으로 기록된 1932년 기근 당시 소련을 방문한 영국의 생물학자 줄리언 헉슬리는 “소련 사람의 체격과 건강 상태가 영국인보다 더 양호하다”고 했다. 극작가 버나스 쇼는 “스탈린은 10년 전이라면 불가능했을 정도의 물자 공급을 러시아 국민에게 선사했다.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한다”고 했다.

이렇게 무지하기만 했었다면 용서의 여지는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소련 체제의 잔혹성이 알려지자 그들은 이중 잣대를 집어들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왕국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흰 장갑을 끼고 윤이 나는 바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는 트로츠키의 말처럼 소련의 국가폭력은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는 논리였다. 버나드 쇼는 그 논리를 충실히 따랐다. “진취적인 우리 이웃 국가가 정직한 사람들에게 더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주기 위해… 한 줌의 착취자와 투기자를 처단하려고 할 때 우리가 짐짓 도덕적인 태도를 취하며 왈가왈부할 수 없다.” 독일 극작가 포이히트방거는 한 술 더 떴다. 그는 유능한 경제 관료였던 퍄타코프의 재판을 직접 본 뒤 “재판 과정에 허위나 조작이 있었다는 상상은 어떤 식이든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이 재판 참관기를 ‘1937년 모스크바’란 제목으로 출판했다. 당시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조지프 데이비스도 1941년 펴낸 ‘소련에서의 임무’라는 책을 통해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모던타임스Ⅰ’ 폴 존슨) 스탈린은 이런 책들을 숙청의 희생자들에게 들이밀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러한 무지와 기만의 이중주는 오늘날 이 땅에서도 숱한 변주곡을 만들어냈다. 천안함 침몰은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에 대한 일부 야당의 완강한 불신은 그러한 변주곡의 한 악장(樂章)이다. 그러나 지방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악장의 주제가 북한 책임론으로 바뀌고 있다. 북한 소행을 보여주는 과학적 증거 앞에서 “천안함 사태의 1차적 책임은 북한에 있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자세 변화에는 북한의 무관(無關)을 계속 주장했다가는 신종 북풍(北風)으로 지방선거를 망칠 우려가 있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개운치 않다. 북한에 나쁜 소리는 하기 싫고 그렇다고 선거를 망칠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옹색함이 그대로 읽혀진다.

정부 발표에 의문을 제기하고 혹시 있을지 모를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야당의 당연한 책무다. 그러나 그것은 팩트(사실)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미군 오폭설’ ‘좌초설’ ‘내부 폭발설’ 같은 소설에 기대서는 그 책무를 충실히 수행하기도, 여론의 지지도 얻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북한 소행을 인정한 것은 다행이나 타이밍을 놓친 것은 안타깝다.

그동안 야당이 견지해온 북한 포용 정책은 나름대로 성과가 없지 않았다. ‘북한 퍼주기’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국민들이 전쟁 가능성을 잊어버릴 만큼 평화 분위기-보수 쪽에서는 이를 ‘위장된 평화’라고 폄하하지만-를 조성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 문제는 그러는 사이 북한의 실체를 잊어버렸다는 점이다. 천안함 사태 전개 과정에서 야당이 저지른 패착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우리에게 북한은 무엇인가. 조지 오웰은 영국에 대한 간디의 저항운동이 가능했던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반체제 인사가 한밤중에 사라져 영원히 소식을 들을 수 없는 나라에서라면 간디의 방식이 어떻게 먹힐 수 있었겠는가… 지금 이 순간 소련에서 간디 같은 사람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우리도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북한에서 남한 진보 세력의 방식이 통할 수 있을까. 아니 진보 세력이 존재할 수나 있을까. 대답은 너무 자명하지 않은가.

팩트에 눈과 귀를 닫을 때 인식의 오류가 생겨나고 왜곡된 인식은 잘못된 처방을 낳는다. 북한은 우리에게 이중의 의미를 갖는다. 포용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엄연한 현실적 위협이기도 하다. 국민이 바라는 것은 이런 균형감각이다. 그랬을 때 건강한 진보 세력의 형성과 정권 재창출도 가능해진다. 이것이 처참하게 찢긴 천안함이 진보 진영에 던지는 메시지이다.

정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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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05월 27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