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조사가 1589년(선조 22) 낙서전을 짓고 심었다는 팽나무(전북 기념물 제114호)
진묵조사가 지었다는 낙서전 ((전북 문화재 자료 제128호)
진묵조사 영정
671년(문무왕 11) 부설거사가 창건한 망해사
망해사 현판
서해를 바라보고 있는 종각
진묵조사(震黙祖師)와 김제 망해사 팽나무
‘바다를 바라보는 절’이라는 이름을 가진 망해사(望海寺)는 우리나라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심포리에, 다른 한 곳은 울산시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 있다.
전자는 671년(문무왕 11) 부설거사라는 아직 출가하지 않는 사람에 의해서, 서해지역에, 후자는 헌강왕(재위, 875~886) 대에 왕명에 의해 동해지역에 창건된 배경은 다르면서도 신라시대에 지어진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김제의 망해사를 우선 찾기로 했다. 조선중기 학승으로 명성이 높았던 진묵조사가 심은 오랜 세월 바닷바람을 맞으면서도 건재한 팽나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팽나무를 기념식수한 사람은 조사(祖師)이외 다른 분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장마기간이라 날씨도 고르지 못하고, 대구에서 김제는 길도 멀지만 전주를 거쳐서 가야하기 때문에 교통편도 좋지 못하다. 그러나 우의를 준비해 떠나기로 했다. 호기심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88고속도로를 달리니 차창으로 전개되는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
모 인사가 에베레스트 트래킹에서 만난 셀파를 초청했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한국의 산을 두고 왜 먼 그곳을 찾는지 알 수 없다고 하드라는 말을 들었지만 7월의 우리나라 산하는 너무나 싱그럽다. 눈이 시리게 푸른 산과 들, 그 사이에 옹기종기 붙은 마을, 정갈하게 가꾼 논밭을 보니 마음이 한결 순수해진다. 이래서 여행이 필요한 것인가?
전주에 내려 김제 행 버스를 타니 비가 더 세게 내렸다. 지도를 꺼내들고 행선지를 찾고 있던 내게 한 분이 말을 걸어왔다. 망해사를 보고 대구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막차가 17시 40분이라 걱정이라고 했더니 비용이 다소 들더라도 택시를 이용하라며 친절하게도 전화를 걸어 흥정까지 해 주었으며 망해사와 진묵조사, 그의 어머니 고씨에 얽힌 이야기까지 해 주었다.
스님의 법명은 일옥(一玉)이며 법호는 진묵(震黙)으로 1562년(명종 17) 만경현 불거촌(佛居村, 현 김제시 만경읍 대진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조의(調意)씨라고 하는데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추정한다. 속설에는 고(高)씨라고 한다.
7세 되던 해 전주의 서방산 봉서사(鳳棲寺)에 출가했다고 한다. 불경을 읽는데 한 번 눈에 스치면 외어 아무도 그를 가르칠 수 없었다고 한다. 언젠가 주지가 어린 그로 하여금 신장단(神將壇)에 향불을 올리는 일을 시켰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주지의 꿈에 신장들이 나타나 ‘우리는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장인데 부처님이 오히려 우리를 위해 향을 올려 불안하다. 어서 그만두록 해 달라’ 라고 하여 즉시 중지시키고 스님이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알았다고 한다.
생시에 많은 이적(異蹟)을 행했다. 봉서사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유학자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 1573~1661)과 절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봉곡이 <주자강목(朱子綱目)>를 빌려주고 하인을 딸려 보냈다. 스님은 책을 바랑에 넣어 짊어지고 길을 걸으며 한 권씩 꺼내어 대강대강 훑어본 뒤 한 권 한 권 땅에 떨어뜨리고 한 권의 발문만을 가지고 절로 돌아갔다. 뒷날 봉곡이 진묵에게 물었다. ‘책을 빌려가서 버리는 것은 무엇 때문이요’ 진묵의 대답은 ‘고기를 잡은 뒤는 통발을 잊는<得魚忘筌>법이지요’ 봉곡이 강목을 꺼내 진묵에게 그 내용을 물으니 한 글자도 틀림없이 모두 대답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유앙산(維仰山,, 현 김제시, 만경읍 화포리) 길지에 장사를 지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해마다 서로 제사를 올리고 풀을 깎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의 농사는 풍년이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앞 서 잠시 이야기 한 고시레 역시 조사의 어머니 고씨를 섬긴다는 뜻이라고 한다.
1633년(인조 11) 지극히 평화로운 모습으로 열반하시니 세수 72세 법랍 52세였다. 부음을 접한 봉곡 선생이 ‘비록 승려라고 하지만 사실은 선비이다. 슬픔을 억누를 길이 없구나. ’라고 하였다고 한다.
망해사 팽나무는 1589년(선조 22) 낙서전(樂西殿, 전북 문화재자료 제128호)을 준공하고 심은 것이라고 하니 400여 년 전이다. 2 그루가 나란히 서 있어 스님이 함께 심은 것 같으나 전라북도 기념물 대장에는 1그루(지방기념물 제114호)로 되어있어 어느 것이 기념물인지 알 수가 없다. 뿐만 아니라, 그 흔한 안내판도 세워놓지 않았다.
당호(堂號) 낙서는 서해바다를 보는 즐거움이 있는 집이라는 뜻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스님이 즐겨보았던 앞바다는 지금 새만금 방조제 공사로 내해(內海)가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으나 지금상태는 좋다. 특히 일몰이 아름답다고 하나 날씨조차 흐리고 또 해가지기 전에 되돌아 가야하기 때문에 아쉬움을 남기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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