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우당 최영경(1529~1590)선생이 1576년(선조 9) 덕천서원을 창건할 때 심었다는 소나무, 수우송으로 불려진다.
영원한 처사로 사림의 사표가 된 남명선생을 기리는 덕천서원
덕천서원 현판
남명선생과 수우당의 위패가 있는덕천서원 숭덕사
남명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산천재
화순인 최영경과 산청군 산천재 수우송
동부여성문화회관에서 수영, 무용 서예 등 취미생활과 뜨개질, 요리, 옷 수선 등 창업과정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여 문화유적답사 반을 조직, 내가 가이드를 맞게 되었다.
여성들의 건전한 여가선용과 문화와 자연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는 채선근 관장의 배려였다.
첫 행사로 경남 함양을 다녀왔다. 지리산을 품고 있어 경관도 아름답지만 ‘우(右) 안동’이라할 만큼 많은 선비들이 배출된 고장이다. 반응이 좋았다는 후문이 있었다. 두 번째 답사 역시 같은 권역인 산청으로 정했다.
출발 당일 새벽 태풍 뎬무의 영향으로 엄청나게 많은 비가 왔다. 그러나 집결지에 도착하니 다행히 그쳤다. 어쩌면 우중(雨中) 답사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을 하면서 승차했다. 2시간 30여분 끝에 남사마을에 도착했다. 미리 부탁했던 해설사 정구화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으나 최씨 고가며, 이씨 고가를 둘러보고 사양정사를 관람하는 중에 빗줄기가 더 굵어졌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단속사지에 도착하니 폭우로 변했다. 단속사지는 여행경험이 많은 관광버스기사도 못 찾아 길을 헤맬 만큼 잘 알려지지 않는 곳으로 나로서는 비장의 코스였다. 왜냐하면 그곳에 있는 우리나라 최고령의 매화나무 정당매(政堂梅)를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문화유적을 보면서 선조들의 높은 예술적인 재능에 감탄을 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더 창조적인 후손이 되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노거수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선조들의 손때가 묻은 그 나무들이 오랜 세월 폭풍우와 병충해를 이겨내고 살아있는 것조차 경이로울 뿐만 아니라, 심은 사람이 나무를 통해 전하고자하는 이야기를 이해하는 일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비가 억수로 내려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생각의 차이를 실감하며 다음 목적지인 남명사적지로 향했다.
점심을 내원사 계곡에서 먹으려고 했으나 우중이라 그곳 해설사이자 남명(南冥)의 14세손인 조종명님께 부탁했더니 덕천서원 강당과 동, 서재 마루사용을 허락했다.
서원 앞에 있는 큰 은행나무를 보고 심은 이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기념관을 둘러보고 산천재로 향했다. 바로 앞에는 소위 ‘남명매(南冥梅)’로 알려진 남명선생이 직접 심은 매화나무가 있다. 내 친구 박 군이 노쇠한 이 나무의 종 보존을 위해 접목(椄木)해서 묘를 키우고 있다고 했더니 조 선생께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울러 산천재 앞 큰 소나무를 가르키며 남명의 제자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 1529~1590)선생이 1576년(선조 9)심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얼른 사진을 찍었다.
수우당은 본관이 화순(和順)으로 1529년(중종 24)년 아버지 병조좌랑 세준과 현감 손준의 딸인 어머니 평해 손씨 사이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질을 보여 초시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대과에는 운이 닿지 않아 그 후 성리학에 몰두했다고 한다.
35세(1564)에 남명선생의 명성을 듣고 서울로부터 내려와 동생 여경과 함께 선생을 찾아뵈옵고, 제자가 되었다. 38세(1567년) 이대기와 더불어 덕산 산천재로 갔다. 이 때 성주 출신 김우옹도 함께 수학했다.
40세(1569)가 되던 해 봄 이정(李瀞)이 남명선생을 찾아 왔는데 이때 김우옹 등이 더불어 <심경>을 공부했다. 44세에 학행으로 정인홍과 함께 천거되어 경주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 해 주부에 연이어 수령, 도사, 장령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 사림의 존경을 받든 문정공 안민학(安敏學, 1542~1601) 찾아와 정철(鄭澈)을 자주 찾아가 칭찬하고 만나 볼 것을 권했으나 단호히 거절했다.
43세(1572)에는 서울에서 남명선생의 부음을 듣고 바로 달려와 제를 드린 후 3년 동안 애도하니 이대기가 찾아와 위로했다. 47세(1576) 하항, 하응도, 구변 등과 덕천서원을 창건하는데 앞장섰다. 이 때 서원 앞에 소나무 100그루를 심었는데 1그루는 그가 직접 심어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수우송(守愚松)이라 했다고 한다.
1590년(선조 )년 정여립역옥사건에 연루되어 옥사(獄死)했다. 그러나 이듬 해 신원되어 대사헌에 추증되고, 1611년(광해군 3)그가 스승인 남명선생을 기리기 위해 주도적으로 창건한 덕천서원에 배향되었다.
애써 창건했던 덕천서원 역시 그 후 대원군 때 훼철되는 등 불운을 겪었듯이 주변 일대도 신작로를 개설하는 등 많이 훼손되었다. 다만 스승 남명이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던 산천재 앞에 당시 심은 소나무 몇 그루가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 중에서 딱히 어느 것이 수우당이 직접 심은 나무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조경을 주도했던 수우당의 뜻은 살아있을 것이므로 이 모두를 수우송(守愚松)으로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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