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0년)충렬왕 16) 유청신선생이 원나라에서 어린 나무를 가져와 심은 호두나무(천연기념물 제398호)
2줄기로 자란 호두나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는 호두나무 열매
유청신의 공덕비와 호두 전래 사적비
천안시가 만든 특산물 소개
호서 제일의 선원 광덕사
광덕사연혁
대구에서 가져가 심은 수양버들(삼거리공원)
고흥인 고려 승상 유청신과 천안 광덕사 호두나무
천안은 꼭 가봐야 할 곳이었다. 남몰래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나, 흉금을 털어놓고 지내는 친구가 있어서가 아니다. 15여 년 전 ‘삼거리’ 복원에 필요하다며 가져간 수양버들이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하고, 우리나라 최고령 호두나무가 보고 싶어서였다.
내가 몸담고 있었던 대구시에서는 수양버들을 키우고 있었다. 민요나 유행가요에 등장할 만큼 우리 민족에게는 친숙한 나무이나 솜털 때문에 민원이 많아 베어 내어야할 형편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수(雄)나무양묘였다.
어느 정도 자라면 강변에 심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천안시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든지 분양을 요구해왔다.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상사인 모 행정부시장을 통해 지원을 요청했다. 그래서 보낸 수양버들이 모두 150그루였다.
천안삼거리는 지난 날 삼남(三南)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으로 입성하기 위해 머물며 숱한 애환을 난긴 곳이라 복원에 동참하는 것도 좋은 일이라 여겼다. 또한 한 선각자의 특별한 나무사랑으로 호두하면 천안을 연상하리만큼 지역의 가치를 높였고 아울러 주민의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한 호두나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번 답사에는 딸 은정이는 물론 며느리도 동행했다. 광덕사 입구 좌측 편에는 ‘고려 승상 영밀공 유청신 공덕비’와 ‘호두전래 사적비’가 우뚝 서 있었다.
일주문의 전면은 ‘태화산 광덕사’ 후면에는 ‘호서제일 선원’이라는 편액이 걸려있어 명찰임을 실감했다. 신라의 자장율사가 세웠으며 보물 6점, 천연기념물 1점 등 승보(僧寶)도 많았다.
호두나무(천연기념물 제398호)는 보화루 오른 쪽에 있었다. 지상 0,6m 정도에서 2개의 가지로 갈라졌다가 다시 3가지로 뻗어나갔다. 지난 봄 극심한 추위에 가뭄에도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많이 열렸다.
나무 앞에는 ‘유청신선생 호두나무 시식지’라는 표석이 서 있었다. 영밀공 유청신 선생이 1290년(고려 충렬왕 16) 9월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을 모시고 돌아 올 때 어린 나무와 열매를 가지고 와서 나무는 광덕사 안에 심고 열매는 집에 심었는데 그 때의 나무가 자란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올해로 720년이 되어야 하는데 안내판에는 수령이 400년이라고 해 적어도 300년의 오차가 있다.
천연기념물 중 이런 예가 몇 곳 있는 데 줄기에서 맹아가 돋아나거나 노출된 뿌리에서 새로운 가지가 돋아나는 경우 일 때에는 심은 년도를 기준으로 함이 어떨지 개념이 재정립이 되어야할 것 같다.
영일공 유청신(柳淸臣, ? ~1329)은 본관이 고흥인 것처럼 고흥의 고이부곡(高伊部曲)사람이다. 선대는 그 곳의 관리였다고 한다. 몽골어를 잘 해 여러 차례 원나라 사신으로 다녀왔고 그 공으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낭장(郎將, 정6품, 무관)이 되었다.
당시 부곡출신은 정 5품 이상의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계를 뛰어넘어 승진을 거듭한 그는 1294년(충렬왕 20)에 우승지(정3품), 1296년(충렬왕 22)에는 왕명의 출납과 궁궐의 경호 및 군사기밀을 담당하는 밀직사의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종2품)에 임명되어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 충선왕으로부터도 신임을 받은 그는 광정원부사(光政院副使)를 거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했다.
그러나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면서 정정에 휘말려 원나라에 압송되고 차신, 최유엄, 홍선 등 충선왕 지지자들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 원에 억류되었던 충선왕이 원의 무종(武宗)을 옹립한 공으로 권력을 장악하자 그 또한 중용되고 비(庇)대신에 청신(淸臣)이라는 이름을 황제로부터 하사 받았다. 1310년(충선왕 2) 정승에 임명되고 고흥부원군(高興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소환될 때 따라가 그 곳에서 죽었다. 시호는 영밀(英密)이다.
호두나무는 손자 장(莊)에 의해 보급이 확산되었다. 여말 나라가 혼란하자 아버지와 함께 낙향하여 할아버지가 가져온 호두나무 기르기에 열중했다고 한다.
한말 의병장 유인석(柳麟錫, 1842~1915), 독립운동가 유관순(柳寬順, 1902~1920)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병천에 가서 천안의 또 다른 명물 순대로 점심을 먹고 독립기념관을 들였다가 삼거리공원에서 대구에서 장가간 수양버들과 해후했다. 수양버들은 원산지가 중국이고 능수버들은 우리나라라고 하여 별도로 구분하고 있으나 오랜 세월 섞여 살며 교잡되어 개체의 독립성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농업기술센터자료에 의하면 호두가 ‘10대 특화작목’에서도 제외되어 이제 천안의 명물로서 가치가 상실되어가는 것 같아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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