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의 큰나무가 일본목련으로 스님의 유해가 묻힌나무다. 후박나무는 일본목련의 한자식 이름이다.
법정스님
유해가 안치된 곳 대나무로 표시된 안쪽
불일암
불일암 현판
생전에 사용하시던 고무신
얼굴을 씻고 발을 씻던 대야
평소 쓰고 다니시던 밀집모자와 손수 만든 의자
암자 입구의 이대 혹자는 대나무 일주문이라고도 한다. 스님을 경배하듯 굽게자라고 있다.
송광사 대웅보전
법정스님과 송광사 불일암 후박나무
법정(法頂)스님의 입적(入寂)은 많은 국민을 슬프게 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운동’을 제창하여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부정과 비리가 난무하는 현실에서 철저히 무소유(無所有)로 살아오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는 마지막 가는 길에 관(棺) 하나 만드는 것조차 거부했다.
내가 스님을 존경하게 된데 대해서는 두 가지 사연이 있다. 첫째는 대표작 <무소유>를 읽고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마 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지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난 키우기를 예로 든 구절에 큰 감동을 받은 것이고, 둘째는 당시로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스님 연구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기 때문이다.
지눌은 고려중기 무신 정권 시절 타락한 귀족불교를 민간불교로 바로 세우고, 선종과 교종의 갈등을 통합하는 등 정혜(定慧)결사라는 이름으로 불교개혁을 주도한 스님이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팔공산 거조사에서 시작되어 조계산 송광사에서 마무리되었다.
또한 같은 책 ‘설해목’의 ‘모진 비바람에도 끄덕 않던 아름드리나무들이---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꺾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라는 구절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강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돌이켜 보면 비록 그렇게 살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살려 고는 많은 애를 썼었다.
이런 회한(悔恨)에 잠기면서 장마 중에도 불일암(佛日庵)으로 향했다. 그 곳은 스님이 오래 동안 거처한 곳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육신이 잠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10년 4월 28일 49재를 마친 스님의 유해는 손수 심은 후박나무 밑에 안장되었다.
스님은 1932년 일제강점기 전남 해남에서 태어났다. 23살이 되던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선사를 은사로 출가했다. 1959년 해인사 전문 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이후 지리산, 쌍계사와 조계산 송광사 등에서 수행했다.
1972년 첫 저서 <영혼의 모음>을 출간하고 이듬 해 불교신문사 논설위원, 주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 개헌 서명운동 등 현실정치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인혁당 재 건위 사건에 충격을 받고 불일암으로 돌아왔다.
1976년 그의 대표작 <무소유>를 출간했다. 그 후 송광사 수련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을 거쳐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가서 홀로 정진하기도 했으며 1993년 프랑스 최초 한국사찰 길상사를 파리에 창건하고 이듬해에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창립하여 서울, 부산 등에서 본격으로 대중을 상대로 법문을 펼쳤다.
1995년 김영한으로부터 대원각을 시주로 받아 조계종 말사로 등록하였으며1998년 명동성당 100돌 기념초청 강연을 하는 등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편협하지 않았다. 2010년 3, 11 세상을 떠나니 법랍 55세 세수 78 세로 입적했다.
<무소유> <서있는 사람들> <산방한담> <물소리 바람소리> <텅빈충만> <버리고 떠나기>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순천에서 송광사 가는 대중교통은 시내버스로 1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매표소를 지나 한참 올라가다가 개울을 건너기 전 왼쪽으로 접어들면 불일암 가는 길이다. 처음에는 잡목이, 다음에는 편백과 삼나무가 우거졌다가 곧이어 왕대, 마지막은 이대 숲길이다.
원래 자정암(慈靜庵)이었다고 한다. 스님이 새로 꾸미고 이름을 불일(佛日)로 바꾼 것인데 불일은 지눌(知訥) 스님의 시호인 만큼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자 했던 것 같다. 불일암은 정갈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많았다. 스님의 유해가 묻힌 후박(厚朴)나무는 생각보다 컸다. 이외애도 태산목, 굴거리나무, 벽오동, 산수유, 편백나무, 꽝꽝나무 등 스님이 손수 심은 나무들이 많았다.
오는 도중 간간히 비를 뿌려 걱정을 많이 했는데 현장에서는 아주 잠깐이나마 햇살을 드러내 사진 찍기를 도와주었다. 결코 우연이 아니리라. 그러나 스님의 유해가 묻힌 후박(厚朴)나무는 한자식 표현일 뿐 실제 이름은 ‘일본목련(日本木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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